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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75> 진격 길에 나서다

세 시간쯤 흘렀을 것이다. 나는 미 1군단의 밴 브런트 참모장이 작전계획 수정 작업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작업을 마친 밴 브런트가 내게 수정한 작전명령서를 쥐여줬다. 나는 다시 확인했다. 국군 1사단이 경의(京義) 축선의 우익을 맡아 평양으로 진격하도록 돼 있었다.



이승만 “평양엔 반드시 ‘마이 보이’들이 먼저 입성해야”

대전비행장으로 와서 경비행기 L5로 청주에 돌아왔다. 사령부에 들어서면서 나는 기다리고 있던 부하들에게 “자, 이제 우리가 선봉(先鋒)으로 평양에 진격한다”고 외쳤다. 사령부는 참모들과 사령부 본부대원들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도로우선권이라는 게 있다. 청주로부터 수원을 거쳐 서울로 향하는 길은 이미 앞장서서 길을 떠난 미 1기병사단과 그 예비인 영국 27여단이 점유하고 있었다. 이들이 다 진군할 때까지 그 도로를 사용할 수 없었다. 이틀인가를 기다렸다. 마침내 우리 1사단에 도로 사용 허가가 내려졌다. 길을 떠날 차례다. 우리 1사단은 임진강 고랑포를 38선 돌파 공격을 위한 집결지(集結地)로 정한 뒤 1950년 10월 6일 청주에서 출발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평양 입성(入城))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전쟁 중의 작전지휘권은 이미 미군에 이양한 상태였지만, 평양 점령에 관한 의지는 대단했다. 정일권 참모총장을 몇 차례나 불러들여 “평양에는 반드시 ‘마이 보이(my boy)’들이 먼저 입성해야 한다”고 독촉했다고 한다. 당시 이 대통령은 국군을 늘 ‘내 아이’, 즉 ‘마이 보이’로 애칭하면서 자랑스러워 했다. 국군 7사단에도 그 명령이 내려갔던 모양이다. 나중에 7사단의 8연대 병력 일부가 작전구역을 고려치 않고 평양에 들어선 이유다.



국군과 유엔군이 거센 기세로 북진하고 있던 1950년 10월, 미 해군 전함 미주리함이 북한의 청진 앞바다에 진출해 함포 사격을 가하고 있다. 미 해군은 북한군의 연결망을 끊기 위해 북한 해역에 접근해 수시로 공격을 퍼부었다. 미주리함은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했으며, 1945년 9월 2일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이 이 함상에서 이뤄졌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10월 8일 들어선 서울은 활기를 띠고 있었다. 나는 서대문 녹번리 파출소에 사단 CP를 차렸다. 3개월여 만에 다시 찾아온 서울이었다. 감회가 없을 수 없지만 그 속에 묻혀 있을 여유가 없었다. 내 생각은 평양으로만 향하고 있었다. 서울에 있던 가족 생각이 났다. 잘 있을까. 6월 25일 아침 집 대문을 나선 뒤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가족이다.



17독립연대를 이끌고 인천에 상륙해 먼저 서울에 도착한 동생 인엽이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당시 지금의 충무로 극동건설 빌딩 자리에 있던 일신국민학교(초등학교)에 연대 CP를 차려 놓고 있었다. 지프를 타고 동생을 찾아갔다.



동생은 나를 보자마자 “다들 무사하시다. 어머니와 형수 다 안전하다”고 말을 꺼냈다. 나는 동생으로부터 가족 안부와 함께 17연대의 작전 내용을 대강 전해들은 뒤 바로 사단 CP로 돌아왔다.



나는 부족한 차량부터 챙기기 시작했다. 먼저 앞서 나간 미 1기병사단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기동력을 높여야 했다. 그와 함께 나는 주변에 산재해 있는 각 연대 CP를 찾아다니면서 상황을 점검하기에 바빴다.



이튿날 새벽 우리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임진강 고랑포에 있는 면사무소에 도착해 상황을 다시 점검했다. 우리보다 사흘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미 1기병사단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기동력도 우리에 비해 우수한 데다 출발까지 먼저 한 그들이었다. 미 군사고문들에게 그들이 어디를 돌파했는지 알아보라고 했다.



“벌써 개성을 지나 북진 중인 것 같다”고 했다. 그들은 개성과 금천을 지나 남천과 신막, 사리원 방향으로 계속 나아갈 것이다. 우리보다는 꽤 앞서 있는 셈이었다. 1사단의 기동은 아무래도 그들 같지는 않았다. 고랑포에 도착한 첫날 우리는 5㎞를 진군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고랑포 북쪽 구하리였다. 이 속도로는 절대 평양에 먼저 입성하는 게 불가능했다.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사단 CP로 돌아왔다. 내 기색을 살피던 윌리엄 헤닉 대령(국군 1사단에 배속된 미 제10고사포단장)이 “사단장, 왜 침울한 표정이냐”고 물었다.



“밀번 군단장에게 우리가 평양에 먼저 도착할 수 있다고 장담했는데 막상 해보니까 힘이 든다. 오늘 겨우 5㎞ 진군하고 말았다. 이렇다면 우리는 선두를 차지할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내 말을 듣고 있던 헤닉이 갑자기 “조지 패튼 장군을 혹시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이 사람이 왜 갑자기 제2차 세계대전 북아프리카와 서유럽 전선에서 미군 전차군단을 이끌었던 패튼 장군을 말하는 것일까. 그의 다음 말이 궁금했다.



백선엽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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