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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우파 운동의 狂風에 맞선 우쭈광·신펑샤 부부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1950년대 중반 자녀들과 함께한 우쭈광·신펑샤 부부. 신펑샤(왼쪽)는 여섯 살 때부터 노래를 부른 당대 최고의 평극(平劇) 배우였다. 김명호 제공

1956년 10월 헝가리에서 정변이 발생했다. 주동은 생명과 자유와 사랑을 노래하다 요절한 민족시인을 추앙하던 지식인 조직 ‘페퇴피 서클’이었다. 공산당에서 축출당한 전임 총리를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하려 했다.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자본주의의 복벽”이라고 단정했다. 무력을 동원해 진압해 줄 것을 소련에 강력히 요구했다.

헝가리 사태는 마오쩌둥에게 경종을 울렸다. 하루아침에 헝가리 공산당처럼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 실제로 베이징·상하이·우한 등 대도시에서는 공산당을 비판하는 학생집회가 간간이 열렸다. 헝가리 사태의 초기와 흡사했다.

마오쩌둥은 “혁명에 승리하자 일부 동지의 의지가 쇠퇴했다. 인민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정신은커녕 지위와 명예에만 눈이 벌겋다. 앉았다 하면 먹고 입는 얘기로 시간을 보내고 누가 얼마를 더 받고 덜 받는 타령이나 해대는 것들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며 본격적인 당(黨) 내 정풍운동(整風運動)을 전개했다. 관료주의도 호되게 비판했다. “관료주의는 금품이나 받아먹고 시치미 떼는 부패한 것들보다 죄질이 더 나쁘다. 군중을 대할 때 좋은 말로 하는 법이 없고 매도할 궁리만 한다. 문제가 발생해도 달려가 해결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타도돼야 마땅한 것들이다.”

이어서 ‘반우파 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초등학교 교사에서 부장급에 이르기까지 온갖 부류의 사람들 50여만 명이 우파로 낙인이 찍혔다. 문화부 부부장 중 한 사람이 ‘문예보’에 장편의 글을 발표했다. 제목이“이류당 우파 소집단을 철저히 분쇄하자”였다. 이류당에 출입하던 문화인 거의가 된서리를 맞았다. 베이징 영화제작창은 전체확대회의를 열어 ‘반혁명 우파분자’ 우쭈광(吳祖光)을 성토했다. 문화부 부부장이 우의 부인 신펑샤(新鳳霞)를 호출했다. “네 남편은 정말 나쁜 놈이다. 태도를 분명히 해라.” 신은 되물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부부장은 당일 배포된 인민일보를 내밀었다. 우파분자인 남편과 이혼하고 공산당 입당을 자청한 여인의 결단을 찬양하는 기사가 대문짝 만하게 실려 있었다. “바로 이거다. 좀 보고 배워라.” 신은 주저하지 않고 거절했다. “당은 지식분자들을 개조한다고 했다. 남편을 개조시키면 될 거 아니냐.” “개조가 불가능한 사람이다.” “가능하다.” “아주 먼 곳으로 보내겠다. 영원히 못 볼지도 모른다.”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 “도대체 얼마 동안을 기다리겠다는 말이냐?” 신은 평극(平劇)의 주인공 이름을 거론했다.

“왕바오촨은 쉐핑꾸이를 18년간 기다렸다. 나는 28년을 기다리겠다.” 부부장은 발끈했다. “당장 나가라.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이 부부장은 훗날 묘한 말을 남겨 당사자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신펑샤만이라도 구하기 위해 내 깐에는 무진 애를 썼지만 허사였다.”

신펑샤는 톈진의 빈민굴 출신이었다. 문맹이었지만 노래를 잘했다. 여섯 살 때부터 목소리 하나로 가족들을 부양했다. 천하의 기재(奇才) 우쭈광을 만나 글을 깨쳤다. “내게는 너무 과분했지만 우쭈광은 하늘이 보내준 유일한 선물 이었다.” 결국은 여배우 뤼언(呂恩)과 동거 중이던 우를 손아귀에 넣은 당대 최고의 평극 배우였다.

하다 보니 신(新)이류당 당주가 되었던 우쭈광은 1958년 봄 500여 명의 우파분자와 함께 베이다황(헤이룽장성 북부, 현재의 싼장평원 일대. 지금은 곡창지대로 변했지만 당시엔 황무지였다)행 새벽 열차를 탔다. 그날 따라 눈이 내렸다.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아 늦게 결혼한 딩충은 출산을 앞둔 부인 선쥔(沈峻)을 병원에 둔 채 황먀오즈, 여류작가 딩링(丁玲) 등과 함께 베이징을 떠났다. 딩충과 황먀오즈는 벌목장에 배치받았다. 체격이 우람한 사람들은 고생이 많았지만 두 사람은 키 작은 덕을 단단히 봤다. 여러 명이 나무를 운반할 때 어깨가 나무에 미치지 않았다. 타고난 재주는 어쩔 수 없었다. 그 와중에서도 베이다황(北大荒)문예를 편집했다.

문혁 초기에도 4인방은 “중국의 페퇴피 구락부”라며 이류당을 정조준했다. 최종 목표는 저우언라이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저우가 모를 리가 없었다. 홍위병들에게 “문인들이 모이던 곳이다. 조직이 아니다. 이류당을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설득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온갖 흉악한 용어가 이류당 사람들의 이름 앞에 다시 난무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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