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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 신뢰 얻으며 실리 외교, 북방영토 확장 결실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흔히 외교는 평화적 수단이고 군사는 전쟁 수단으로 생각하지만 양자는 모두 국제정치의 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세종은 국제무대에서 목소리의 크기는 실력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세종은 명나라에 사대해 국체를 보존하는 한편 신뢰를 획득해 북방 강역 확대에 나설 수 있었다. 실리를 중시하는 외교가 세종 외교의 특징이었던 것이다.
송조천객귀국시장(送朝天客歸國詩章) 북경에서 조선 사신을 송별하는 장면을 그려놓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세종이 취한 명과의 사대 외교는 다양한 포석이었다. 사진가 권태균


성공한 국왕들 세종④ 사대교린

조선 외교정책의 기본원칙은 사대교린(事大交<9130>)이었다. 중국에는 사대하고 일본을 비롯한 여타 국가와는 사이 좋게 지내는 정책이 교린이었다. 조선 초기의 사대주의는 조선 후기의 사대주의와는 달랐다. 조선 후기에는 소중화(小中華) 사상이 말해주듯 조선의 정체성을 버린 극단적 사대주의였지만 조선 초기의 사대주의는 통일제국 명(明)과 공존하기 위한 실리 외교였다. 명의 성조(成祖) 영락제가 태종 6년(1406) 안남(安南:베트남)을 공격해 갓 건국한 호조(胡朝)를 멸망시켰다. 이에 태종이 “나는 한편으로는 지성으로 섬기고, 한편으로는 성을 튼튼히 하고 군량을 저축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태종실록 7년 4월 8일)”고 말한 것처럼 사대는 국체 보존을 위한 소국의 외교정책이었다.

세종도 태종의 사대 외교정책을 계승했다. 그런데 명나라 사신들의 횡포가 극심했다. 특히 조선 출신으로 명나라 환관이 된 사신들의 횡포가 자심했다. 영락제는 태종 3년(1403) 11월 화자(火者:고자) 60명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태종은 겨우 35인의 화자를 선발해 보냈는데 태종실록은 “임금이 서교(西郊)에서 전송하니 환자(宦者)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고 전하고 있다. 태종 7년에도 영락제는 안남(安南)에서 화자 3000명을 데려왔으나 모두 우매하여 쓸 데가 없다. 오직 조선의 화자가 똑똑하여 일을 맡겨 부릴 만하다면서 다시 300~400명의 환관을 요구했다. 태종은 “이것들이 따로 종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많이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항의하기도 했으나 기본 수요는 맞춰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명나라에 끌려가 환관이 된 인물이 윤봉(尹鳳)이었다. 풍해도(<8C50>海道:황해도) 서흥현(瑞興縣) 출신의 윤봉은 울면서 명나라로 끌려간 후 승승장구해 세종 10년(1428)께에는 내시부의 장관인 태감(太監)까지 올랐다. 그 후 조선에 사신으로 나와 자신을 넘긴 조선에 항의라도 하듯이 갖은 횡포를 다 부렸다. 뇌물을 요구하는 것은 기본이고 일개 평민인 자신의 형제들에게 벼슬을 요구하기도 했다. 태종은 그의 형제 10여 명에게 서반(西班:무관)의 사직(司直)·사정(司正) 등을 제수해 달랠 수밖에 없었다.

세종은 12년(1430) 명 선종(宣宗)으로부터 “주문(奏文)과 공물(貢物)을 보내는 왕의 사대하는 마음이 정성과 공경에 독실하여 해를 거듭해도 해이하지 않고 더욱 높아가니 왕의 현량(賢良)함을 기꺼워하며 거듭 아름답게 여기고 기뻐한다(세종실록 12년 7월 17일)”는 국서를 받기도 했다. 명 선종은 아울러 창성(昌盛)과 윤봉 등을 사신으로 보내면서 “사신들에게 사사롭게 재물을 주지 말라”고 명시하는 국서를 보냈다. 이때 김종서는 재물을 주지 않으면 해가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세종은 황제의 칙유(勅諭)를 어길 수 없다며 거부했다. 그러자 창성과 윤봉 등은 명 선종에게 조선에 대해 아주 나쁘게 보고했다. 그 바람에 세종은 이듬해 “금번의 칙서에 있는 말은 마치 고아(孤兒)를 농락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언제 황제가 이렇게까지 한 적이 있느냐(세종실록 13년 8월 19일)”고 한탄할 정도로 불쾌한 국서를 받아야 했다.

이후 세종은 자신의 소신을 접고 윤봉 등의 요구를 적극 수용했다. 세종은 그의 아우 윤중부(尹重富)에게 당상관인 총제(摠制) 벼슬까지 제수했으나 윤봉은 며칠 후 윤중부를 2품으로 승진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이번에는 김종서가 반대했지만 세종은 윤봉의 청탁을 들어주었다. 이렇게 명 사신에게도 정성을 다한 결과 세종은 선종으로부터 이런 국서를 받았다.

“왕은 조정을 공손하게 섬겨 영락(永樂) 연간부터 지금까지 처음과 한결같이 정성스러우니 탁연한 현왕(賢王)이라고 할 만하오. 그래서 중국 조정도 왕을 앞에서나 뒤에서나 한결같은 성의로 대합니다(세종실록 14년 5월 29일).”

세종이 사대 외교에 주력한 이유는 강대국 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북방 강역을 확대하기 위해서라도 명의 신뢰 획득은 중요했던 것이다. 세종은 재위 14년(1432) 2월 10일 “우리나라의 근심은 북방에 있다면서 북방 야인(野人:여진족)들의 침략에 대비해 연대(烟臺:높은 포대)를 쌓고 화포(火砲) 등을 준비하게 했다.

드디어 그해 12월 9일 여진족 400여 기가 여연(閭延) 경내에 침입해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강계절제사(江界節制使) 박초(朴礎)가 추격대를 조직해 약탈물 일부를 빼앗아 왔는데 “마침 날이 저물어 끝까지 추격하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세종은 크게 분노해 대규모 정벌을 결심했다. 문제는 자칫하면 명나라와 분쟁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이었다. 세종은 “우리나라에서 끝까지 추격하지 못하는 것은 상국(上國:명)의 경계를 마음대로 넘을 수 없기 때문이니 이러한 뜻을 갖추어 중국에 주문(奏聞)하는 것이 어떻겠는가(세종실록 14년 12월 9일)”라고 말했다.

이런 뜻으로 세종이 명나라에 보낸 국서는 극도로 공순한 말 속에 칼날이 숨어 있었다.

“홍무(洪武) 18년(1385) 태조 고황제(高皇帝:주원장)의 조지(詔旨)에 화외(化外:이민족 지역)를 구별하지 않고 일시동인(一視同仁:모두 평등하게 사랑함)한다’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본국은 이미 동인(同仁)하시는 안에 있으니 성자(聖慈)를 입은 것이 밝게 내렸습니다. 지금부터는 야인들이 전처럼 작란하면 우리나라에 영(令)을 내리셔서 태종 문황제(文皇帝:영락제)께서 선유하신 성지의 뜻에 따라 편의대로 대책을 세워 쫓아가 잡도록 한다면 온 나라가 매우 다행이겠습니다(세종실록 14년 12월 21일).”

조선이 편의에 따라 만주의 여진족을 공격하겠다는 뜻이었다. 세종은 이 국서에서 태종 10년(1410) 여진족 올적합 금문내(金文乃) 등이 경원부를 공격하자 길주도 도안무 찰리사(吉州道都安撫察理使) 조연(趙涓)이 “군사를 거느리고 두문(豆門)지방까지 추격했다(領兵追到豆門地面)”고 말했는데, 두문은 곧 압록강 북쪽 토문(土門)이었다. 태종 7년(1407) 3월 명나라 예부(禮部)에서 조선에 보낸 문서 중에 “(여진족) 백호(百戶) 양합라(楊哈剌) 등이 가족을 데리고 토문 지면(地面)에 가서 살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중국에서는 두문을 토문이라고 적기도 했다. 숙종 때 세운 ‘백두산 정계비’가 “동쪽은 토문이 된다(東爲土門)”고 명기하고 있으므로 토문의 위치는 중요한데 현재 중국은 두만강의 별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세종은 재위 15년(1433) 병조에 내린 교지에서 “우리나라의 북쪽 경계는 두만강(我國家北界豆滿江)이니 하늘이 만들고 땅이 이루어놓았다”고 말한 것처럼 토문과 두만강은 그때 전혀 다른 지역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실제로 다른 지역이었다.

“알동(斡東:두만강 대안. 현 러시아령)은 남경(南京) 동남쪽 90여 리(里)에 있으니, 지금의 경흥부(慶興府) 동쪽 30리에 떨어져 있다. 알동의 서북쪽 120여 리에 두문성(豆門城)이 있다(태조실록 총서).”
조선 후기 ‘해동지도’에 나와 있는 압록강 상류의 사군(四郡)지도. 세종은 조(祖宗)의 강역은 양보할 수 없다는 확고한 원칙을 갖고 있었다.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다.


태조실록은 현재의 두만강 연안 경흥 동쪽 러시아령에 알동이 있고 그 서북쪽 120리 지역에 두문성이 있다고 전해주고 있으니 두문은 곧 만주에 있는 것이다. 여태까지는 세종 때에야 국경이 압록강까지 확대된 것처럼 서술해왔다. 그러나 태조실록 태조 4년(1395) 12월 14일자는 “의주에서 여연(閭延)에 이르기까지의 강 연변 1000리에 고을을 설치하고 수령을 두어서 압록강으로 국경을 삼았다”고 말해 태조 때 이미 조선의 국경이 압록강임을 명시하고 있다.

여진족이 여연을 공격하자 세종은 재위 15년 3월 최윤덕을 평안도 도체찰사로 삼고 황해·평안 양도의 군사 1만5000여 명으로 만주 지역을 공격해 180여 명을 사살하고 250여 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한동안 잠잠하던 여진족이 다시 준동하자 세종 19년(1437) 무렵 이 지역을 포기하자는 견해가 대두했다. 그러나 세종은 “조종(祖宗)의 강역(疆域)은 마땅히 조심하여 지킬 것이지 가볍게 물러서거나 축소시킬 것이 아니다(세종실록 19년 2월 14일)”고 단호하게 거부했다. 세종은 도리어 재위 19년 9월 평안도 도절제사 이천(李<8546>)에게 8000명의 군사를 주어 공격하게 했는데 만주 깊숙한 오라산성(兀刺山城:현 환인현 오녀산성)까지 진격했다.

세종은 외교와 전쟁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세종은 육진 개척의 주역인 무신 최윤덕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전조(前朝:고려)와 국초(國初)에 간혹 무신으로서 정승을 삼은 이가 있는데, 어찌 그 모두 최윤덕보다 뛰어난 자이겠는가. 그는 비록 수상(首相:영의정)이 되더라도 가할 것이다(세종실록 14년 6월 9일).”

세종은 조선을 서생(書生)들의 나라로 만들 생각이 없었다.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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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