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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타협의 정치 위해 4·19 정신 계승해야”

“부모님은 나를 낳아주셨지만 4·19는 내 삶을 지탱해온 정신이다.”

꼭 50년 전. 이기택(73·사진) 민주평통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은 고려대 학생위원장(57학번)으로서 4·18 고대생 시위를 주동했다. 당시 정치깡패들이 귀가하는 고대생들을 테러한 이 사건은 4·19의 도화선이 됐다. 1967년 7대 국회의원 선거 때 4·19 학생 대표 자격으로 신민당의 전국구 의원이 된 이 수석부의장은 7선 의원을 지냈다. 4·19 민주혁명 50주년 기념사업회 회장, 4월혁명 사료총집 발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그를 민주평통 사무실에서 만났다.

-4·19 50주년을 맞는 감회가 남다를 법하다.

“진달래꽃이 피고 질 때마다 4·19가 새롭지만 올해는 특히 새롭다. 당시 같이했던 동지들을 향한 마음이 더 각별하다.”

-어떻게 시위를 주도하게 됐나.

“그때는 총학생회장 제도가 없었고 단과대 학생위원장들이 두 달씩 돌아가면서 학생위원장을 맡았다. 난 상대 학생위원장이었다. 당시 야당인 민주당의 공명선거추진위원회 산하에 학생특별위원회가 있었다. 고대에선 내가 위원장을 맡게 돼 자연스럽게 중심이 됐다.”

-4월 18일이라는 D데이는 어떻게 정해졌나.

“3월 말부터 단과대 위원장들이 수시로 모였다. 그러던 중 김주열 사건(4월 11일)이 터졌다. 플래카드 준비, 대의원 연락 등을 하려면 일주일은 걸릴 것 같아 18일로 정했다. 교정에 경찰이 돌아다닐 때라서 신입생 환영회를 한다고 거짓 소문을 냈다. 당시 흰 수건 하나씩을 기념품으로 준비했는데 나중에 이 수건에 ‘고대’라는 글씨를 써서 머리에 두른 채 데모를 했다.”

-4·19의 역사적 의미를 든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두 축은 산업화와 민주화다. 민주화는 4·19에서 출발된 거다. 4·19가 없었다면 그 이후 한국에 강한 야당, 민주화 세력이 생겨날 수 있었겠는가. 그런 점에서 4월 혁명의 가치는 산업화 못지않다고 본다. 특히 4·19에 대한 반동으로 5·16이 일어났는데, 역설적으로 5·16 세력이 국민과 역사 속에서 살아남을 명분과 출구로 택한 게 경제였고 그걸 성공적으로 해냈다.”

-지금 청소년들에겐 4·19의 의미가 별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군사정권이 4·19를 폄하시킨 건 당연하다. 하지만 이후 민간정부에서도 4·19 정신은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정권에 대한 시민의 저항이란 본질 때문인 거 같다. 5·18 광주민주화운동만 해도 국가 수훈자가 수천 명이다. 하지만 전국적 규모였던 4·19는 유족회, 부상자들을 합쳐 보훈대상이 500~600명밖에 안 된다.”

-4·19 세대 정치인의 맏형으로서 한국 정치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

“당시 하숙집 방에 유서까지 써놓고 데모에 나갔다. 내가 국회의원이 된 것도 4·19 학생대표 자격이었다. 4·19가 꽃을 피운 민주화는 더 세련돼야 한다. 국회가 특히 그렇다. 민주주의의 요체는 여야가 대화와 타협으로 양보하면서 합의를 이루는 과정이다. 세련된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4·19 정신은 다시 계승돼야 한다.”

글=박승희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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