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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연중 기획 - 4·19 50년] 1960년 4·19혁명 전개 과정

2·28 민주학생 의거

2월 28일은 일요일이었다. 이승만 정부가 대구 수성천변에서 예정된 야당(민주당) 선거연설회에 고교생들이 참여하지 못하도록 일요일 등교를 지시했다. 경북고 수백 명이 이에 항의, 도청 앞에서 “민주주의를 살리자”고 외쳤다. 대구고·경북사대부고·경북여고 수백 명도 합세했다.

3·15 부정선거와 마산 의거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일. 이승만 정부는 사전투표, 3∼5인조 반공개투표 등을 저질렀다.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이 99%에 이를 정도였다. 전국에서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마산에선 “투표의 자유를 달라”고 항의하는 시민들에게 경찰이 발포했다. 7명이 숨지는 등 80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

김주열군 시신 발견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에서 16세의 마산상고생 김주열군의 시신이 떠올랐다.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이었다. 시민 수만 명이 “살인선거 물리쳐라” “내 표를 내놓아라”라고 항거했다. 한 경찰관이 이들을 향해 발포, 16명이 다시 사상했다. 4·19혁명의 전조였다. (사진 ①)

4·18 고려대생 피습사건

4월 18일 오후 1시 “민주이념 쟁취를 위한 반항의 봉화를 높이 들어야 하겠다”는 선언문 발표와 함께 고려대생 4000여 명이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까지 걸어가 연좌 농성을 했다. 이후 유진오 고려대 총장의 설득으로 귀교하던 학생들을 정치깡패 100여 명이 폭행했다. 서울에서의 첫 유혈사건이었다. (사진 ②)

4·19 혁명(피의 화요일)

4월 19일 오전 서울대생 2000여 명이 “민주주의 바로잡아 공산주의 타도하자”라고 외치며 국회의사당 앞에 집결했다. 건국대·성균관대·연세대 등의 학생과 시민들도 합류해 경무대로 향하자 경찰이 발포했다. 이승만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사진은 학생들이 부상한 중학생을 옮기는 모습. (사진 ③)


4·25 교수단 시위

4월 25일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전국 27개 대학교수단 300여 명이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했다. 시위 군중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중앙청 앞에선 “이승만 대통령 하야하라” “경무대로 가자”라는, 이기붕의 집 앞에선 “공산당도 싫다, 이기붕도 싫다”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사진 ④)

이승만 대통령 하야

4월 26일 오후 1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담화가 방송됐다. 오후 2시 국회에선 재선거, 내각제 개헌 등을 결의했다. 군중은 “모든 것은 해결되었다” “건설하자, 질서를 회복하자” “학원으로 돌아가자”라는 플래카드를 들었다. 이틀 뒤 이 대통령은 사저인 이화장으로 돌아갔고, 이기붕 일가는 집단 자살했다. (사진 ⑤)

7월 29일 민주당 승리

7월 29일 민·참의원 선거가 있었고 민주당이 양원 모두에서 압승했다. 8월 12일 민·참의원합동회의에서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가 선출됐다. 민주당은 그로부터 두 달여 만에 신·구파 간의 갈등 끝에 분당했다. 제2공화국은 이듬해 5·16 군사쿠데타까지 277일간 존속했을 뿐이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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