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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로 고려인의 삶 담은 책 펴낸 엄 넬리 교장

“러시아에서 한민족이 겪은 수난의 역사와 이를 이겨낸 우리 조상의 혼을 젊은 세대에게 일깨워주고 싶었습니다.”

『러시아 심장부에 활짝 핀 무궁화』란 책을 펴낸 고려인(러시아 거주 한인) 4세 엄 넬리(70·사진)씨의 말이다. 엄씨는 50세가 넘어 배운 한국어로 고려인들의 수난과 성공의 역사를 체험담을 중심으로 묶어냈다. 러시아 유일의 한민족 학교인 모스크바 ‘1086 학교’를 1992년 설립해 현재까지 교장을 맡고 있는 그는 6~7세대까지 내려온 젊은 고려인들이 갈수록 한민족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잃어가는 것이 안타까워 이 책을 펴내게 됐다고 설명했다. 17일 리츠 칼튼 호텔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 앞서 그를 만났다.

-가족사가 어떻게 되나.

“19세기 말 증조부가 강원도 영월에서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했다. 극동 우수리스크에 정착했던 우리 집안은 1937년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으로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으로 옮겨갔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부친이 소련 기술고문단으로 북한에 파견되면서 가족 모두 한동안 평양에서 생활했다. 그러다 북한의 소련파 숙청으로 평양을 탈출해 모스크바에서 살게 됐다. 나는 65년 모스크바 국립 사범대를 졸업한 뒤 계속 교사의 삶을 살고 있다.”

-한민족학교를 세우게 된 계기는.

“91년의 한국 방문이 계기가 됐다. 당시 나는 러시아말밖에 하지 못했다. 꿈에도 그리던 고국을 찾았지만 할 줄 아는 한국말이라곤 고작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 ‘저는 한국말을 모릅니다’의 세 마디가 전부였다. 그 답답함을 되물림하지 않기 위해 한민족학교 설립을 결심했다. 개교를 위해 러시아 당국자들을 설득하러 다니면서 스스로 한국말 공부에 매달렸다. 하루에 단어 15개를 외우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이듬해 모스크바 남쪽에 ‘1086학교’가 문을 열었다. 1086은 학교의 일련번호다.”

-어떤 방식으로 학교를 운영했나.

“처음엔 지역주민들이 ‘특정민족 의식을 부추긴다’며 시위를 하고 학교 창문을 부수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그들을 설득했다. 그러면서 러시아와 다른 민족 학생도 받아들였다. 교장으로서 전교생 이름을 일일이 욀 정도로 학생 지도에도 정성을 쏟았다. 내 월급으로 우수교사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하기도 했다. 그 덕분인지 지금 우리 학교는 대학 진학률이 98%나 되는 모스크바의 명문이 됐다. 입학 경쟁률이 10대 1에 이른다. 2006년 교육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블라디미르 푸틴 당시 러시아 대통령으로부터 최고애국훈장을 받았다.”

-한민족 교육은 어떤 것을 하나.

“한국어는 물론 잡채· 김치· 비빔밥과 같은 한식에 부채춤이나 탈춤 같은 전통문화까지 가르친다. 수업 시작과 끝을 알리는 음악으로 민요 ‘아리랑’을 틀고 우수 학급 표시로 무궁화 꽃을 걸어둔다.”

-책을 낸 소감은.

“고려인 젊은이들이 한국말과 문화를 배우는 자극제가 되고, 한민족으로서 자부심을 얻는 데 작은 보탬이 됐으면 한다.”

유철종 기자, 안수혜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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