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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대본에 없는 말

어느 의학 학술대회에서 200여 명의 의사들을 대상으로 20분 동안 강연할 기회가 생겼다. 일요일에 하루 종일 진행되는 학술대회 중 1시간 동안 열리는 ‘시대 담론’이라는 작은 프로그램의 일부였다. 과거에는 드물었지만, 의사들도 세상의 다른 분야에 대한 폭넓은 소양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진 요즘은 순수한 의학 학술대회의 일부를 의학 이외의 분야에 할애하는 경우가 비교적 흔해졌다.

주최 측이 나에게 요청한 제목은 ‘한국의료의 미래’였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변화하는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이니, 이 주제는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필경 우문현답을 기대하고 강사를 섭외했을 텐데, 나로서는 우문우답(愚問愚答)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 불안했다.

어쨌거나 한국의료의 과거와 현재를 개괄한 후, 앞으로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몇 가지 변화를 짚어보는 내용으로 강연을 준비했다. 그런데 마무리가 약했다. 고민 끝에 남의 아이디어를 차용하기로 했다. 하버드 의대 교수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아툴 가완디의 책 『닥터, 좋은 의사를 말하다』의 후기에 나오는 ‘긍정적인 괴짜가 되기 위한 다섯 가지 제언’을 들려주기로 한 것이다.

가완디는 ‘대본에 없는 질문을 던져라, 투덜대지 마라, 수를 세라, 글을 써라, 변화하라’라는 다섯 가지를 주문했다. 나는 그의 제언 중 세 항목이 ‘의사소통’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대본에 없는 질문을 던지라는 것은 틀에 박힌 사무적 대화 이외의 말을 환자 및 동료와 주고받으라는 뜻이다. 의사에게서 풍기는 기계 냄새를 줄임으로써 환자를 편안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업무효율도 올리고 스트레스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글을 쓰라는 것도 단순히 일기 등을 써서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지라는 뜻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세상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라는 말이다. 딱딱한 글쓰기 외에도 e-메일, 블로그, 트위터 등 글을 통한 외부와의 소통수단은 아주 많다. 남에게 읽히는 글을 씀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타인의 아이디어를 얻고 사회에도 기여할 수 있다.

투덜대지 말라는 것은 긍정적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인 동시에 쓸데없는 투덜거림으로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지 말라는 뜻도 담고 있다. 부정적 의사소통은 없느니만 못하다. 투덜거리는 것은 대개 건전한 비판과는 좀 거리가 있다. 해봤자 별 소득도 없고 남들도 알아주지 않는 푸념에 불과하다. 게다가 속으로 투덜거리는 것은 자신에게만 해롭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 투덜거리는 것은 남에게, 그리고 조직에 해를 끼친다. 하품처럼, 투덜거림도 전염되는 것이니까.

이것이 비단 의사들에게만 필요한 덕목은 아닌 것 같다. 실제로 우리가 내뱉는 말의 대부분은 대본에 있는 말들이다. 특히 업무와 관련해서는, 누군가 각본을 써준 것처럼 뻔한 말만 주고받는 편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대본에는 너무도 많은 투덜거림이 적혀 있다. 모두가 대본에 없는 말을 조금 더 많이 하고, 대신 투덜거리는 일은 조금 덜 한다면, 팍팍한 일상의 고단함이 약간은 덜어지지 않을까.

박재영 ‘청년의사’ 편집주간·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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