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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우 기자의 까칠한 무대<27>학교로 간 발레리나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발레리나 박세은(21). 이 이름, 일반인에게 조금 낯설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강수진과 김지영·김주원의 뒤를 잇는 차세대 선두주자로, 국내 발레계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는 무용수다. 그는 2007년 세계 최고 권위의 로잔 콩쿠르에서 그랑프리를 거머쥐었다. 1985년 강수진에 이어 한국인으론 두 번째 쾌거였다. 이후 아메리칸발레시어터에 입단했고, 지난해엔 국내로 컴백해 국립발레단 주역으로도 활동했다. 세계 최정상급 발레리나가 되기 위한 길을 차근차근 밟고 있었다. 청순한 외모와 출중한 기량 덕인지 팬들은 그를 ‘발레계의 김연아’라 부른다.

그러나 지금, 박세은은 국립발레단을 떠났다. 대신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에 진학했다. 스물한 살이면, 발레리나로서 한창 성장할 때다. 한번이라도 더 무대에 서야 하고, 데벨로페(한쪽 다리를 접었다 높이 드는 동작)를 해야 한다. 물론 한예종이 실기 위주의 교육인 터라 다른 대학 무용과보다 여건이 낫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어찌 실전과 같을 수가 있으랴. 대학 진학은 ‘발레리나’ 박세은에겐 분명 위험한 선택이다.

왜 그랬을까. 박세은의 아버지인 박효근씨는 긴 한숨을 쉬었다. “평생 발레만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부모로선 딸의 은퇴 이후의 삶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세은이는 어린 시절 유학을 떠난 터라 ‘초등학교 졸’에 불과하다. 아무리 발레를 잘한다 한들 그 학력으론 대학 교수는 언감생심이고…”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많은 이가 선망의 눈으로 보지만, 국립발레단 단원으로 산다는 건 녹록지 않다. 수석무용수인 김지영과 김주원의 연봉은 채 5000만원이 되지 않는다. 스타 발레리나의 대우가 그 모양이니 다른 단원들의 처지야 두말 하면 잔소리다. 여기에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명예를 가져라, 예술을 한다는 자긍심을 느껴라”라고 말하는 건 공허할 뿐이다.

현역 시절은 그래도 낫다. 문제는 은퇴 후다. 딱히 갈 데가 없다. 국립발레단원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 해외 발레학교를 다녔기에 국내 학력은 그리 높지 않다. 하지만 국내 대학은, 설사 무용과라 해도 교수가 되기 위해선 기량보단 석·박사 학위가 우선이다. 15년 이상 국립발레단 솔리스트로 활동해왔던 이영훈(40)씨 역시 지난해 은퇴한 뒤 이리저리 알아보다 결국은 ‘발레 학원’을 차렸다. 학원을 내는 게 잘못됐다는 게 아니다. 그래도 그 실력이면, 그 경험이면 제도권 안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게 국가 전체를 위해서도 좋은 일일 테다.

국내 발레계는 수년 전부터 ‘국립 발레 학교’ 설립을 애타게 원해왔다. 러시아도 프랑스도 영국도 국립발레단이 있는 나라엔 어김없이 발레 학교가 있다. 10대 예민한 시기에 발레 영재들을 모아 체계적인 교육을 시켜야 발레 기량이 부쩍 는다고들 한다.

하지만 학위만이 최고로 인정받는 대한민국에선 어쩌면 발레 학교는 ‘미래를 위한 투자’가 아닌 ‘현재를 위한 자구책’일지도 모르겠다. 발레 학교만 있다면 국립발레단원들의 은퇴 후 취업길이 조금은 넓어질 테니 말이다. 발레 학교만 있다면 지금처럼 ‘초졸’이라는 이유로 발레리나가 검정 고시를 준비하지도 않을 테고, 석사 학위를 따야 한다며 땀에 찌든 몸을 이끌고 야간 대학원을 다니는 일도 줄어들 테니 말이다. “발레냐, 아니면 학교냐”와 같은 가혹한 선택은 박세은 하나로 충분하다.




중앙일보 문화부 공연 담당 기자. '성역은 없다'는 모토를 갖고 공연 현장 구석구석을 헤집고 있다. 올해로 4회째를 맞는 ‘더 뮤지컬 어워즈’를 총괄 기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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