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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증 나는 속도로 살아온 ‘61년 소띠’ 85만 명

1993년 6월. 서울발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가 공항 착륙을 위해 하강하고 있었다. 공항 시설물이며 주변 거리들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한여름 청명한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금문교는 ‘여기가 파라다이스’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나는 기내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이국 풍광에 온통 마음을 뺏기고 있다가 문득 “아차” 싶었다. 잠시 잊고 있던 걱정이 밀려왔다. 공항에서 픽업해 준다고 철석같이 약속한 LA 친척은 출국 무렵 야속하게도 연락이 끊겼다. 식솔을 이끌고 손수 샌타클래라까지 가야 할 터에 앞길이 깜깜했다.

덜컥 두려움이 몰려왔다. 강릉 김씨 문중이 경북 상주에 터를 잡은 지 400년 만에 그 자손이 미국 땅에 첫발을 딛게 된 것이다. 나이 32세에 ‘신서유견문’을 써 보리라고 큰소리는 쳤지만 심장은 애달프게도 조막만 하게 쪼그라들어 콩닥거리고 있었다. 그게 미국 생활의 시작이었다.

숙소에 도착해 여장을 풀자 오후였다. 딸아이는 배고프다고 보채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익히 보아온 햄버거 가게가 길 건너편에 있었다. 우리 가족은 뙤약볕 횡단보도로 나섰다. 보행신호로 바뀌길 기다린 지 30분. 미국 생활 첫날부터 왕복 8차로 무단횡단은 도시 무리였다. 한 꼬부랑 지팡이 할머니가 홀연히 나타나 신호등 어딘가를 눌렀다. 곧이어 마법같이 바뀐 횡단보도 파란불. 아니 이런 신호등도 있었던가!

이렇게 시작된 미국 생활은 정말 예상하지 못한 문명과의 좌충우돌,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기름이 달랑거리면 주유소는 왜 그리 용케도 숨어버리고 애간장을 태우게 하는지…. 쨍 하던 하늘도 차만 내리면 돌변해 억수 같은 비를 퍼부었다. 흠뻑 젖은 채 나에게는 늘 ‘샐리의 법칙’만이 작용한다고 야속한 하늘을 바라보며 슬퍼했다. 그래도 1년이 지나자 맨해튼에서의 운전 기법은 옐로 캡 드라이버를 따라잡았을 만큼 발전했다. 그걸 위안 삼아야 했다.

그로부터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내 나이 50이 됐다. 참으로 많은 것이 빠르게 변했다. 나 자신도, 우리나라도. 대체로 긍정적 변화였다. 유학 마치고 돌아와 외국에서 배운 걸 풀어서 좀 써먹으며 그 변화에 동참했다. 어설픈 영어를 애먹이면서 외국 선진제도를 배우고 또 배우러 국제선도 종종 탔다. 이제는 도리어 뭘 가르쳐준답시고 나가는 일도 생겼다.

변방 주민의 위축감에서 다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종전 약소국 국민으로 여겼던 국제사회의 대접은 많이 나아졌다. 학회 조찬 모임에 가면 같은 식단이라도 출신 국가별로 밥값이 달랐다. 한국 사람은 제일 비싼 돈을 내야 하는 10여 개 국가에 속했다. 돈이 좀 들어도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된 것이다. 이제 DNA가 달라져 훌쩍 커버린 아이들은 이국 거리를 걸어도 아버지 때의 촌스러움은 벗어난 것 같아 대견하다.

지난 세월 우리 30대, 40대의 삶은 일과 경쟁의 연속이었다. 기실 탄생부터 가열찬 경쟁이 예정돼 있었다. 소띠 1961년생은 베이비붐 세대 한가운데에서 최대 인구로 태어났다. 통계청 통계로 85만8141명이 살아남아 있다. 2차 베이비붐 세대인 1970~73년생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숫자다. 부제(部制) 수업, 콩나물시루 학급 속에서 부대꼈고 극심한 입시경쟁을 거쳤다. 중학 시절부터 제식훈련을 받아 교련, 문무대, 현역, 예비군, 민방위에 이르기까지 30년간 신성한 국방 의무를 다했다. 철 들고부터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 정보화, 금융위기라는 현기증 나는 변화의 격랑을 근성으로 뚫고 나왔다.

IMF 외환위기 이후 자칫 한눈을 팔면 길거리에 나앉기 십상이었다. 대기업에 취직한 머리 좋은 친구들도 단군 이래 최대의 재앙 앞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중 일부는 아직도 그 여파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 그나마 잘 버텨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도 있다. 이들에게도 닥쳐올 퇴직과 노후 문제는 남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이 살아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들이 있다. 부모 봉양, 자녀 교육 등이다. 그리고 또 할 일이 있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배웠고 그렇게 믿고 살아왔다.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닫도록 교육받았고 또 그것을 현실로 자각한다. 우물 안 개구리 신세는 벗어났지만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면서 걱정이 많다. 천안함 순국장병들의 명복을 빌며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도민이 행복한 더 큰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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