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뉴스 인 뉴스 <93> 중국 5세대 지도자

7593만1000명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정당 중국 공산당은 ‘민주집중제’ 원칙에 따른다. 권력 핵심에 1인의 총서기, 9인의 정치국 상무위원이 포진한다. 2007년 67세의 자칭린(賈慶林)이 상무위원직 연임에 성공한 반면 68세의 쩡칭훙(曾慶紅)은 물러나야 했다. 68세 퇴임룰이 적용된 것이다. 이에 따를 경우 2012년 개최될 18기 당대회에선 1945년 이후 출생자가 남을 가능성이 크다. 2012년 9장의 상무위원직을 놓고 경쟁할 11인의 권력자를 살펴본다.



2년 뒤 이들이 ‘권력 핵심 9석’을 움켜잡는다, 중국 차세대 리더 11명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서열 6위로 선두 시진핑(習近平)



그에겐 ‘태자당(太子黨)’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아버지 시중쉰(習仲勛·1913~2002)이 국무원 부총리를 역임했기 때문이다. 문혁 기간 농촌으로 하방되기도 했던 시진핑은 칭화대 졸업 후 겅뱌오(耿飇) 당시 국방부장의 비서가 됐다. 이후 자신의 발전을 위해선 대중과의 호흡이 필요하다고 보고 허베이성 정딩(正定)현으로 내려가 3년을 일했다. 이후 푸젠성 샤먼(厦門)시 부시장 등 푸젠성에서만 17년 반을 근무했다. 2002년 16기 당대회에서 5세대 지도자 육성에 관한 사항이 안건에 올랐다. 시진핑과 리커창 중 한 명을 정치국 상무위원에 발탁해 중점 테스트하자는 주장이 제출됐다. 장쩌민은 반대했다. 시기상조가 이유였다. 대신 시진핑은 저장성, 리커창은 랴오닝성으로 보내졌다. 정치적 단련과 테스트가 이어졌다. 시진핑은 5년 동안 ‘평안(平安) 저장’ ‘법치(法治) 저장’ ‘녹색(綠色) 저장’을 모토로 내세워 연평균 14% 성장이라는 실적을 올렸다. 2007년에는 7개월 동안 핵심 요직인 상하이 당서기를 맡았다. 천량위(陳良宇) 사건으로 흔들리던 상하이 정계를 세련되게 수습했다. 그해 10월 시진핑은 서열 6위로 상무위원 진입에 성공했다.



역전 노리는 리커창(李克)



리커창의 신조는 ‘신초(愼初·시작할 때처럼 신중하고), 신미(愼微·작은 일에도 신중하며), 신독(愼獨·혼자 있을 때도 삼가고 경계하며), 신욕(愼欲·물욕을 내지 않는다)’이다. 그는 후진타오를 정점으로 하는 공청단파의 핵심이다. 그의 가족 배경은 화려하지 않다. 머리가 뛰어나 중국 대학입시 역사상 경쟁률이 가장 치열했다는 78년 입시에서 베이징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농업경제 기반의 낙후한 허난성, 노후한 중공업 경제 기반의 랴오닝성에서 실적을 쌓았다. 후진타오와는 그가 82년 하버드대 유학 대신 베이징대 공청단 서기로 학교에 남으면서 처음 만났다. 당시 후는 공청단 상무서기였다. 후는 그를 높이 평가해 공청단 중앙후보위원으로 승진시켰다. 그는 사회적 약자를 보듬는 정치가다. 빈곤지역에 학교를 세워주는 희망공정(希望工程), 빈민을 위한 주택 개량사업이 그의 정치적 트레이드 마크다. 2008년 3월 국무원 상무부총리에 선출됐다.



소방대장 왕치산(王岐山)



왕치산의 부친은 칭화대 교수였다. 문혁 때 혁명의 성지 산시성 옌안(延安)으로 하방됐다. 그곳에서 부총리를 지낸 야오이린(姚依林)의 딸과 결혼했다. 그가 칭화대를 나오지 않았음에도 칭화방, 부친이 고급 간부가 아님에도 태자당으로 분류되는 이유다. 역사를 전공한 그는 돌연 경제로 전공을 바꿨다. 정치국 위원이던 장인의 후광으로 89년 건설은행 부행장에 올랐다. 2002년 당 중앙위원에 진출한 뒤 하이난성 당서기가 됐다. 취임 5개월 만에 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 사태가 터졌다. 당 중앙은 혼란에 빠진 베이징으로 왕치산을 불러들였다. “1은 1, 2는 2다. 틀린 정보는 허락하지 않는다”며 사스 섬멸전을 진두지휘했다. 이때부터 왕치산에게는 소방대장이란 별명이 붙었다. 그는 현재 상무, 금융, 시장관리, 관광 업무를 총괄하는 부총리다.



여론관리의 총괄자 류윈산(劉雲山)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는 당내 각 부·위원회 가운데 서열이 가장 높다. 공산당이 여론관리를 그만큼 중시한다는 증거다. 선전부 총책인 류윈산은 ‘글쟁이’ 출신이다. 신화사 네이멍구 주재기자로 출발했다. 80년대 네이멍구 공청단 부서기를 맡으면서 후진타오와 연을 맺었다. 93년 선전부 부부장을 맡으며 베이징으로 진출했다. 97년 15기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에 진입했다. 류윈산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상급자의 뜻에 충실한 ‘정치적 인물’이 됐다. 후진타오의 조화사회(和諧社會) 선전에 열중했다. 현재 공산당 정권을 지탱하는 두 축은 총과 붓이다. 그는 그 한 기둥을 맡고 있다. 



정치국의 홍일점 류옌둥(劉延東)



류옌둥 국무위원은 후진타오 주석과 칭화대 동창이다. 류 위원이 칭화대 공정화학부를 다니던 64년부터는 후 주석과 정치보도원으로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어린 시절 상하이 간부를 지낸 부친을 따라 상하이에서 생활했다. 82년부터 84년까지 공청단 중앙서기처에서 후 주석과 다시 만나 서기로 함께 근무했다. 그 때문에 태자당, 공청단파, 상하이 그룹에 모두 속한다. 그는 공산당 통일전선부에서 17년간 근무했다. 전 세계에 지인이 많다. 현재 국무위원으로 교육, 과학기술, 위생을 담당한다. 성급 당서기 경력이 없다는 게 약점이다.



후진타오 인맥의 리위안차오(李源潮)



7593만 공산당원의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는 리위안차오 중앙조직부장의 부친은 상하이 부시장을 역임했다. 그의 고향은 장쑤성 북부 롄수이(漣水)다. 후 주석의 고향 타이저우(泰州)와 지척이다. 83년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로 발령받아 후 주석을 만났다. 2000년 장쑤에서 후진타오의 과학발전관과 조화사회론을 실천하며 주목을 받았다. 2007년 조직부를 맡은 뒤 당 조직 개혁과 당내 민주화 임무를 수행 중이다.



총리직 제2후보 왕양(汪洋)



가난한 노동자 집안 출신의 왕양은 17세 때 부친을 잃었다. 태자당이 즐비한 정치국에서 그가 빛나는 이유다. 일개 노동자로 시작해 중앙 정치국원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안후이성 기층에서 두각을 보이던 그에게 중앙당교 입학이란 기회가 찾아왔다. 당교 졸업 후 안후이성 공청단 부서기가 됐다. 이때 후진타오, 리커창과 연을 맺었다. 92년 남순강화를 마치고 베이징으로 돌아가던 덩샤오핑의 열차가 안후이성 방부(蚌埠)역에 잠시 멈췄다. 덩은 그곳에서 왕양을 만났다. 그의 관운이 트이는 순간이었다. 93년 그는 38세의 나이로 안후이성 부성장이 됐고, 이후 충칭시 서기를 거쳐 현재 광둥성 서기를 맡고 있다.



환발해(環渤海) 경제권 추진자 장가오리(張高麗)



톈진시 서기 장가오리에게는 파벌이 없다. 농민의 아들로 푸젠에서 태어난 그는 샤먼대를 졸업한 뒤 석유 기업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16년간 잔뼈가 굵었다. 그는 개혁·개방 1번지 선전을 하이테크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정계의 스타가 됐다. 광둥성 부서기를 거쳐 산둥성 서기로 자리를 옮겼다. 산둥을 GDP 2조 위안 클럽에 가입시켰다. 2007년 당대회를 앞두고선 톈진시 서기로 발령받았다. 당 중앙정치국에도 진입했다.



상하이시의 실력자 위정성(兪正聲)



위정성의 인척관계는 놀랍다. 부친의 첫 연인은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江靑)이었다. 모친인 판진(范瑾)의 친오빠는 저명한 역사가 판원란(范文瀾)이다. 그의 큰할아버지 위다웨이(兪大維)는 대만의 국방부장을 지냈다. 위다웨이의 아들은 장제스(蔣介石)의 손녀와 결혼해 장징궈(蔣經國)의 사위가 됐다. 그의 형은 위창성(兪强聲)이다. 정보기관에서 근무하다 86년 미국에 망명해 중국에 큰 타격을 줬다. 그러나 위정성 뒤에는 덩샤오핑의 아들 덩푸팡이 있었다. 덩이 중국장애인복지기금회를 만들면서 실무를 그에게 맡긴 것이다. 이후 그는 산둥성 옌타이(煙臺) 시장을 맡았고 2007년엔 상하이 서기가 됐다.





정계의 마술사 장더장(張德江)



공업, 교통, 인력, 사회보장, 기업개혁, 산업안전을 책임지는 국무원 부총리 장더장은 옌볜대학 조선어과, 북한 김일성대학 경제학과를 나와 한반도 문제에도 밝다. 86년 민정부 부부장으로 승진하면서 덩샤오핑의 아들 덩푸팡(鄧樸方)을 만났다. 이 때부터 관운을 탔다. 95년 지린성, 98년 저장성, 2002년 광둥성 서기를 역임했다. 정세 판단에 동물적 감각을 지녔다는 평이다.



부패 척결로 부상 노리는 보시라이(薄熙來)



3월 초 베이징에서 열린 양회(兩會)에서 언론의 주목을 받은 정치가는 보시라이 충칭시 당서기였다. 그는 부패 척결을 내세워 ‘포퓰리스트’를 꺼리는 중국 정계에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혁명 원로 보이보(薄一波) 전 부총리의 차남으로 태어나 태자당 선두주자로 불려왔다. 다롄(大連)시장, 상무부장, 랴오닝성 당서기를 거쳤다.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뉴스 클립에 나온 내용은 조인스닷컴(www.joins.com)과 위키(wiki) 기반의 온라인 백과사전 ‘오픈토리’(www.opentory.com)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궁금한 점 있으세요? e-메일 기다립니다.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