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기득권층 반발에 從母法 복원, 노비제 확대 ‘시대 역행’

경직도(耕織圖) 노비들이 탈곡하고 지붕을 잇는 것을 노비 주인이 손자를 데리고 구경하는 모습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부분, 작자 미상)하고 있다. 세종은 태종이 제정한 종부법을 종모법으로 환원했다. 사진가 권태균
성공한 국왕들 세종③ 여론 중시 정치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세종은 ‘국왕은 하늘을 대신해 만물을 다스린다(人君代天理物)’는 군주관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백성들을 편하게 양육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세종은 나라를 군주와 사대부 계급이 다스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견지에서 노비제도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부분적인 폐단 완화에 주력했다. 미국의 한국학자 제임스 B 팔레 교수가 조선을 노예제 사회로 규정했던 것처럼 조선은 노비가 생산력의 주요 부분을 담당하는 사회였다. 개인 소유 노비의 광범한 존재는 국가 발전을 가로 막았다.

노비는 관청에 속한 공노비(公奴婢)와 개인 소유의 사노비(私奴婢)가 있는데 사노비의 처지가 훨씬 열악했다. 국가는 노비 수를 줄이고 세금을 납부하는 자영농민 수를 늘려야 했다. 노비제의 가장 큰 문제는 세습제였다. 게다가 양인(良人)과 천인(賤人)이 혼인한 양천교혼(良賤交婚)으로 낳은 자식들은 모친의 신분을 따르는 종모법(從母法:혹은 수모법(隨母法))이 더 문제였다. 부친의 신분이 양인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부친의 신분을 따르는 종부법(從父法)을 채택하면 노비 숫자는 차차 줄어드는 반면 종모법을 실시하면 크게 늘어나게 돼 있었다. 양반 사대부들은 종모법을 채택해 재산을 늘리려 했다.

세종 때 간행한 『농사직설』. 조선의 풍토에 맞는 농사법을 기록한 책으로 이후 수많은 농서의 기본이 됐다.
그러나 태종은 재위 14년(1414) 예조판서 황희(黃喜)가 “아비가 양인이면 아들도 양인이니 종부법(從夫法)이 옳습니다”라고 말하자 “경의 말이 대단히 옳다”면서 종부법으로 개정했다.

“하늘이 백성을 낼 때는 본래 천인(賤口)이 없었다. 전조(前朝:고려)의 노비법은 양인과 천인이 서로 혼인하면 천한 것을 우선해 어미를 따라 천인으로 삼았으므로 천인의 숫자가 날로 증가하고 양민의 숫자는 날로 감소했다. 영락(永樂) 12년 6월 28일 이후에는 공사(公私) 여종이 양인(良人)에게 시집가서 낳은 소생은 모두 종부법에 의거해 양인으로 만들라.(『태종실록』 14년 6월 27일)”

종부법 개정은 신분제의 획기적인 진전이었다. 모친의 신분 때문에 눈물 흘리던 수많은 천인이 구제받은 것은 물론이고 양인의 숫자가 대폭 증가해 국가 재정이 튼튼해지기 때문이었다. 여종을 소유한 양반 사대부들은 종부법에 큰 불만을 가졌으나 태종의 위세에 눌려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이들은 사대부 계급에 우호적인 세종이 즉위하자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드디어 세종은 재위 14년(1432) 3월 “내가 즉위한 이래 조종의 성헌(成憲:법률)을 고치지 않으려고 마음먹었고 부득이한 일이 있을 경우에만 몇 번 고친 일이 있다”며 “공사(公私)의 여종이 양인 남편에게 시집가서 낳은 소생을 양인으로 삼는 일에 대해서는 대신들이 불가하다고 많이 이야기했으나 내가 따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렇게 세종은 종부법 개정 논의의 물꼬를 텄다. 그러자 맹사성(孟思誠)·권진(權軫)·허조(許稠) 등 대신들은 이구동성으로 종모법 환원을 주장했다.

“천인 종모법은 또한 한 시대의 좋은 법규입니다…대개 천한 여인이 날마다 그 남편을 갈아치워서 행위가 금수와 같은데 그 자식은 다만 어미가 있는 것만 알고 아비가 있는 것은 모르므로 종모법(隨母之法)이 생긴 것입니다. 지금 부친의 신분을 따라 양인이 되게 한 법을 혁파해서 어미를 좇아 천인이 되게 하는 법으로 환원하는 것이 상책입니다.(『세종실록』 14년 3월 15일)”

세종은 신중을 기하기 위해 종부법 제정에 관여했던 전 판서 조말생(趙末生)을 불러 제정 경위를 물었다.

“지난 갑오년(태종 14년)에 신이 대언(代言:승지)으로 있었는데 하루는 태종께서 편전(便殿)에서 ‘아비를 따라 양민으로 삼는 법(從父爲良法)을 세우고자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숙번이 옳지 않다고 극력 말했으나 태종이 듣지 않으시고 신에게 법령 집필을 명하셨으며 친히 하교(下敎)하여 법을 세우셨습니다.(『세종실록』 14년 3월 15일)”

이로써 종부법은 태종의 강력한 의지로 제정된 법임이 명백해졌다. 세종은 양천교혼(良賤交婚)을 법으로 금지시키고 불법으로 태어난 자식들은 모두 공노비로 만들자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대신들의 목적은 노비 사유(私有)에 있었으므로 역시 반대했다.

“만약 그런 법을 세운다면 사비(私婢:개인의 여종)는 자녀가 속공(屬公:공노비)되는 것을 즐거워해서 모두 양인을 남편으로 얻어 그 자녀를 다 공천(公賤:공노비)이 되게 할 것이니, 백년이 지나지 않아서 사천(私賤:사노비)은 거의 없어질 것입니다.(『세종실록』 14년 3월 25일)”

이때 세종이 ‘조종의 성헌(成憲)은 고칠 수 없다’고 못 박았으면 이후 조선 역사는 많은 부분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대신들의 요구에 쫓겨 종모법으로 환원하고 말았다. 이후 노비 문제는 조선 멸망 때까지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주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그렇다고 세종이 노비의 처지를 동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세종은 공비(公婢:관청 여종)가 출산했을 경우 100일의 휴가를 더 주게 했으며 재위 16년(1434)에는 남편에게도 30일간의 출산 휴가를 주었다. 그러나 종모법 환원으로 양인 숫자를 감소시킨 것은 하책(下策)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세종은 사대부 계급의 이익을 중시했지만 농민들의 이해가 직결된 부분에서는 농민들의 견해도 청취했다. 공법(貢法) 제정 과정이 이를 말해준다. 조선은 공양왕 3년(1391) 정도전의 주도로 제정된 과전법(科田法) 전세(田稅) 조항을 그대로 시행했다. 과전법은 수전(水田:논) 1결당 조미(<7CD9>米:현미) 30두, 한전(旱田:밭)은 잡곡 30두로 정하고 그 이상 거두면 장률(贓律:장물죄)로 논죄한다고 규정했다.

문제는 관원이 직접 현장에 나가 조사하는 답험(踏驗)으로 매해 세율을 결정하는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이었다. 이는 작황의 풍흉(豊凶)에 따라 세율을 달리하려는 선의에서 나온 것이지만 관원의 농간이 개재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래서 세종은 일종의 정액세제인 공법(貢法)으로 바꾸고 싶어했다. 세종이 전세를 공법으로 바꾼 것은 재위 26년(1444)이지만 그 구상을 처음으로 내비친 것은 17년 전인 재위 9년(1427) 과거의 최종 시험인 책문(策問)이었다. 세종은 ‘왕은 이렇게 말한다(王若曰)’로 시작되는 책문에서 “답험하러 간 관리가 간혹 나의 뜻에 부합되지 않게 백성의 괴로움을 구휼하지 않아서 나는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대들은 (전세에 대해) 숨김없이 다 진술하라. 내가 장차 채택하여 시행하겠노라”라고 말했다. 세종은 재위 18년(1436)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는 등 지속적 관심을 표명하다가 재위 12년(1430) 벼슬아치는 물론 농민들도 포함한 여론조사 실시를 명했다.

“의정부·육조, 각 관사와 서울의 전함(前銜:전직) 각 품관과 각 도의 감사·수령 및 각 품관에서부터 여염(閭閻)의 소민(小民: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를 물어서 아뢰라.(『세종실록』 12년 3월 5일)”

이렇게 역사상 최초로 단일사안에 대한 전국적 여론조사가 실시되었다. 벼슬아치에겐 개인의 의견을 묻고 농민들에겐 호주(戶主)의 의견을 묻는 방식이었다. 세종 12년 8월 10일 호조는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했다. 벼슬아치는 현직 259명, 전직 443명이 찬성한 반면 현직 393명과 전직 117명이 반대했다. 전직자의 찬성 비율이 네 배 정도 높은 것이 눈길을 끈다.
지방 수령과 일반 농민들은 평지가 많고 적고에 따라 지역적인 편차가 심했다. 경기도는 1만7076명이 찬성인 반면 236명만이 반대였다. 전라도는 2만9505명이 찬성이었고 257명이 반대였다. 경상도는 3만6262명이 찬성인 반면 377명만이 반대였다. 평지가 많은 지역은 찬성 비율이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산지가 많은 평안·함경·강원도 등은 반대가 많았다. 평안도는 1326명만이 찬성한 반면 2만8474명이 반대였고, 함길도는 75명만 찬성이었고 7387명이 반대였다. 강원도는 939명만 찬성하고 6888명이 반대했으며, 황해도는 4454명이 찬성이고 1만5601명이 반대였다. 충청도는 6982명이 찬성한 반면 1만4013명이 반대였다.
전체적으로 찬성은 9만8657명이고 반대는 7만4149명으로 찬성 비율이 조금 더 높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세종은 재위 26년 과거에 세 등급이던 토지 비옥도를 여섯 등급으로 나누는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과 한 해의 풍흉(豊凶)에 따라 최고 20두, 최하 4두의 아홉 등급으로 나누는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을 기초로 공법(貢法)을 실시했다.
그것도 찬성이 많은 하삼도(下三道:영남·호남·충청)부터 실시했다가 차차 다른 지역으로 확대했다. 그 시절에 벌써 여론조사를 실시한 세종의 여론 중시 정치를 본받아야 할 때다.

구독신청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태그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