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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징궈를 ‘내 동생’이라고 불렀던 랴오청즈

신화사(新華社) 사장 시절 담배를 피우다 부인 징푸춘(經普春)에게 들킨 랴오청즈가 부하 직원들 앞에서 호되게 야단맞는 장면. 당시 신화사에서 가장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 김명호 제공
1979년 1월 중화인민공화국은 미국과 수교했다. 대만 문제에 여유가 생겼다. 무력통일 대신 화합과 대화를 통한 국공 문제 해결을 제시했다. 자존심이 상한 대만의 국민당 정부는 ‘불(不)담판, 불접촉, 불타협’의 3불(三不) 정책을 고수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60> 일류 인물들이 만든 이류당④

82년 7월 25일 전인대 부위원장 랴오청즈(廖承志)는 인민일보를 통해 대만 총통 장징궈(蔣經國)에게 보내는 ‘즈장징궈신(致蔣經國信)’을 발표했다. “그간의 증오를 털어 버리고 다시 합작의 길을 모색하자”는 내용이었다. ‘내 동생 징궈(經國吾弟)’로 시작되는 가서(家書) 형식의 편지였다. “나이가 들면 지난날이 더욱 그리운 법, 요원하기만 한 남쪽 하늘 넋 잃고 바라보느니, 너만 괜찮다면 당장 짐을 꾸려 네가 있는 타이베이로 가겠다”며 “땅끝까지 가서 파도만 도둑질하면 그곳에 내 형제가 있다. 서로 만나 한 번 웃으면 은혜와 원한 모두가 물거품”이라는 루쉰의 시(詩)까지 한 구절 인용했다. 말미에는 노부인(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에게 대신 문안인사를 전해 줄 것을 청하고 팡량(方良:장징궈의 부인), 웨이궈(緯國:장징궈의 동생)와 조카들의 안부를 챙겼다.

랴오청즈는 대만총통 장징궈를 공개적으로 “내 동생”이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소년 시절 한 울타리 안에서 살았다. 랴오는 황포군관학교 서기의 아들이었고 장은 교장 장제스의 아들이었다.

1980년 9월 루쉰 탄생 100주년 기념위원회 회의를 마치고 건배하는 랴오청즈(왼쪽)와 딩충.
장징궈는 두 살 위인 랴오청즈를 잘 따랐다. 형도 없었지만 친형(兄) 이상이었다. 랴오만 보면 먼발치에서부터 형이라 부르며 달려갔다. 랴오는 장이 잘못해도 화내는 법이 없었다. 응석을 심하게 부려도 귀찮아하지 않았다.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소년답지 않게 낙천적이고 대인의 풍도가 있었다.

랴오청즈는 어렸을 때부터 쑨원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의지가 강하고 감성이 풍부하고 매사에 낙관적인 대혁명가들 틈에서 성장했다. 세상에 태어나 제일 먼저 배운 단어가 ‘혁명’이었다. 16세 때인 1924년 여름 국민당에 입당했다. 이 최연소 당원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저 애는 당을 잘못 선택했다”고 말하는 청년당원들이 많았다. 만화 솜씨가 뛰어나 선전화를 도맡아 그렸다. 이듬해 봄 소년 장징궈는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났다.

랴오는 국민당 우파의 사주를 받은 자객의 손에 부친을 잃자 혁명의 길로 들어섰다. 국민당에서는 퇴출당했다. 당에서 쫓겨난 국민당의 성골(聖骨)은 공산당에 입당해 일본·독일·네덜란드·소련을 오갔다. 모스크바에서는 장징궈와 재회했다. 장은 소련 공산당원이 돼 있었다.

랴오청즈는 감옥과 인연이 많았다. 정식으로 여섯 차례 감옥 생활을 했다. 그중 4번은 외국의 감옥이었다. 일본에서 세 차례 다녀왔고 네덜란드에서도 감옥 밥을 먹었다. 중국에서는 두 차례 영어의 몸이 됐다. 장제스는 무슨 핑계거리를 만들어서라도 랴오를 옆에 두고 싶어 했다. 한번은 직접 관저까지 불러 달랬지만 랴오는 부동자세를 한 채 끝까지 대답을 안 했다.

복장이 터진 장제스는 다시 데려다 가두라고 하면서도 몸에는 절대 손을 대지 말라고 지시했다. 석방되는 날 저우언라이가 직접 가서 인수했다. 국공합작 시절이라 가능했다.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던 저우의 부인은 대성통곡했지만 랴오가 싱글벙글하는 바람에 김이 빠졌다.

공산당에도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있었다. 장정 도중 따로 공산당 중앙을 차린 장궈다오(張國燾)는 랴오를 반혁명으로 몰아 당적을 박탈하고 총살을 결정했다. 랴오를 살린 것은 만화였다. 선전화를 그릴 사람이 없었다. 수갑을 찬 채 선전화를 그리며 장정을 마쳤다.

랴오청즈는 신중국 수립 후 저우언라이와 함께 이류당 사람들과 가장 가까운 고위층 인사 중 한 사람이었다. 만화가 딩충과는 키·식성·성격 등이 비슷했다. 특히 낙관적인 성격은 판에 박은 듯했다. 두 사람 모두 이름보다는 ‘샤오랴오(小廖)’와 ‘샤오딩(小丁)’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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