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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잔인한 4월’

‘북한의 어뢰 공격 가능성이 만일 사실로 판명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혹은 하지 말아야 할까?’ 천안함 침몰 초기의 충격과 혼돈이 가라앉으면서 지금 이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문화계에서 활동하는 한 친구에게 물었다. “아, 이제 그놈의 이념 전쟁은 그만해야지. 아직도 북을 적으로 보다니 말이야….” 놀란 내가 짓궂게 묻는다. “그럼, 만약 말이야. 일본이 우리 해군을 친다면?” 그는 답한다. “그거야, 나서 싸워야지.”

왜 일본이 치면 싸우고 북한이 치면 싸우지 말아야 하는지, 그는 이유를 잘 설명하지 못한다. 혼돈스럽지 않은가? 도대체 우리의 적은 누구인가? 차가운 바다 밑에 수장된 꽃다운 젊음들은 그럼 해상 재난의 희생자인가?

천안함 침몰 이후 보름이 지나면서 그간 종잡을 수 없었던 뉴스와 해설이 북한의 공격 가능성을 조심스레 비치기 시작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중국 방문 여부와 북한의 처절한 현실에 관한 보도가 이어진다. 화면에 초췌하고 병색이 짙은 독재자의 모습이 비치고, 그 배경에 천안함 침몰 의혹이 어른거린다. 북한은 이 상상의 연결망에서 공포를 자아내는 존재인 것만은 분명하다.

최근 실패한 화폐개혁이 북한 내부에서 얼마나 많은 동요와 불안을 일으키고 있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화폐개혁의 책임자를 공개 총살할 정도이니 심상찮은 체제 위기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한 고위급 탈북자에 의하면 요사이 김정일에 대한 공공연한 비방이 북한 전역에 확산되고 군·당·정 고위 간부들이 흔들리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 말께부터 또다시 기근의 소문이 돈다.

기억하는가. 1990년대 중반 북한의 대기근 이래 지난 10년간 우리는 북한 동포들을 향한 온정의 손길을 전 국민적으로 펼쳤다. 김대중ㅃ鍮デ� 정부가 앞장섰다. 이른바 ‘햇볕정책’은 김정일의 ‘강성대국’ 건설에 그야말로 햇볕의 역할을 했다. 문제는 김정일의 강성대국이 군사력, 그것도 핵무기라는 위험한 도박에 매달려 있었다는 사실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눈살을 찌푸렸고 서방 국가들은 경제 봉쇄로 다스렸다. 한국의 보수 정권은 핵 포기 없는 일방적인 경제 원조에 선을 그었다. 결국 자신을 보호하려고 개발한 핵무기 때문에 북한 경제가 빠른 속도로 붕괴되고 그것이 체제 위기로 이어진 것이다.

그런데 북한 나름의 소규모 외자 유치와 부분적인 시장경제 도입을 통해 개방의 맛을 본 북한 인민들이 더 많은 것을, 더 빨리 요구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를 충족시킬 의지도 능력도 없는 김정일 체제는 결국 무력 탄압을 강화하거나 부존자원과 맞바꾼 중국의 제한적인 경제 원조에 기대 하루하루 연명해 나갈 것이다.

김정일의 초상이 언젠가 읽은 T S 엘리엇의 시에 등장하는 ‘시빌(Sybil)’이라는 무녀(巫女)의 이미지와 겹치는 이유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로 시작되는 ‘황무지’에 나오는 삽화다.

한번은 쿠마에서
나도 그 무녀가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지.
애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하고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네.
‘죽고 싶어’.

‘죽고 싶어’-이것이 김정일의 진정한 소원일지 모른다. 무녀 시빌은 점치는 여자였다. 아폴론 신으로부터 셀 수 없이 오랜 수명을 허용받았으나 젊음을 달라는 청을 잊었기에 늙어 쪼그라진 상태로 살아야 했다. 그녀는 조롱 속에 갇혀 아이들의 구경거리가 된다. 한때 아폴론 신의 애정을 한 몸에 받고 불멸을 꿈꿨던 그녀는 죽음보다 못한,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좀비와 같은 상태에 처해졌다.

핵무기로 불멸을 꿈꾸는 김정일은 우리에게 공포의 대상인가, 아니면 ‘황무지’의 무녀같이 조롱과 연민의 대상일까? 공포정치는 인민의 경제를 고사시키고 결국 통치자를 죽지 못해 연명하는 기형으로 만들어 버린다. 조롱 속에 갇혀 젊음 없는 영생이라는 저주를 받고 있는 무녀 시빌. 그녀는 젊음을 소생시켜 주는 약속을 아폴론으로부터 얻어 내든지, 아니면 ‘죽고 싶다’는 소원을 이뤄야 구원된다. 그러나 태양신 아폴론은 이미 그녀에게서 떠났다.

‘잘 잊게 해 주는 눈(雪)으로 대지를 덮었던 겨울’이 지나고 ‘잔인한 달 4월’을 김정일도 우리도 같이 맞고 있다. 온갖 만물이 새 생명을 꽃피우는 이 계절, 우리에겐 아직도 바다 밑에 잠긴 44명의 장병이 애달프고, 김정일의 북한에는 기아에 시달리는 인민들이 가득하다. 한반도에 진정한 봄은 언제나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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