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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면 생각나는 ‘천식’

한반도의 봄은 황사로 온다. 네이멍구(內蒙古)와 고비사막에서 발원한 황사가 편서풍을 타고 과민한 내 기관지로 날아온다. 봄날이 찬란하기는커녕 온통 누렇다. 어제는 밖에 나갔다 집에 돌아와 귀를 터니 사막이 쏟아져 나온다. 목이 아파 기침을 하니 별이 마구 쏟아지고 눈이 서걱거려 비비니 눈물처럼 전갈이 떨어져 나온다. 바람은 고비사막에 사는 여우처럼 운다. 먹는 밥알도 누렇다. 억지로 꾹꾹 씹어 삼키는 중간에도 몇 번인가 숨이 차서 숟가락을 놓고 마음을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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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다닐 때다.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나는 천식이와 싸웠다. 아마 못된 내가 힘없고 약한 천식이를 놀렸을 거다. 악이 받쳐 달려드는 천식이를 나는 무서워서 마구 때렸다. 폭력의 바닥에는 공포가 있다. 코피가 나자 싸움은 끝났지만, 끝내 분이 풀리지 않는지 천식이는 씩씩거리며 한참이나 나를 노려보았다. 기억난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듯 나를 노려보던 천식이 눈이.

재수할 때 나는 친구가 다니던 화실에 자주 놀러 갔다. 거기서 이름이 같은 천식을 만났다. 나는 친구와 친구의 친구인 천식이와 함께 술을 마셨다. 친구와 친구의 친구인 천식은 감자전을 먹으며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과 관련해 논쟁했다. 나는 이야기는 듣지 않고 감자전만 먹었다. 친구는 자기 주장을 강하게 폈고, 천식의 말은 막거나 잘랐다. 마침내 친구의 장광설이 끝나자 차례를 기다리던 천식은 반론을 펴기 시작했다. 친구도 천식의 말을 막거나 자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듣고 있는 줄 알았던 친구는 자세히 보니 묵묵히 졸고 있었다. 천식은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도 없는데 열심히 최선을 다해 자기 주장을 펼치고 있었던 셈이다. 기억난다. 비웃는 나를 영문도 모른 채 바라보던, 그렇게 맑고 빛나던 천식이의 눈이.

고등학교 다닐 때도 우리 반에 천식이가 있었다. 원불교를 독실하게 믿은 그는 교당의 학생회장이었다. 수업시간에 교과서 대신 칸트 같은 어려운 철학 책을 읽던, 분식집에서 라면을 먹을 때면 “국물 없는 라면은 맹목이고, 라면 없는 국물은 공허하다” 같은 싱거운 말도 진지하게 하던 친구였다. 언제나 사려 깊고 어른스러운 친구였다. 하루는 교당에서 하는 시화전에 오라고 초청해서 갔다.

거기서 웃을 때 이가 가지런하게 보이던, 교당의 학생 부회장이라는 여학생을 만났다. 나는 온갖 그럴듯한 말과 행동으로 그 여학생의 마음을 사려고 애썼다. 결국 그 여학생으로부터 사귀자는 고백을 얻었다. 그리고는 그 여학생에게 관심과 흥미를 잃었다. 나는 유치하게 그런 것을 무슨 자랑이라도 되는 것처럼 천식이에게 떠들었다. 얼마 전에 미국에서 사는, 잠시 한국에 다니러 온 같은 반 친구에게서 들었다. 웃는 모습이 예뻤던, 얼굴에 주근깨가 몇 개인가 귀엽게 반짝이던 그 여학생을 천식이가 오래도록 정말 좋아했다는 사실을. 기억난다. 내가 그 여학생과의 일을 자랑 삼아 떠들 때 나를 바라보던 천식이의 고요한 눈이.

사실 그들의 이름은 천식이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봄이 오고 황사가 오면 나는 천식 발작을 한다. 그렇게 숨이 가쁠 때마다, 참다 못해 기관지 확장제를 목구멍 안으로 뿜어 넣을 때마다, 거친 숨이 겨우 가라앉고 한동안 마음이 아득해질 때마다 나는 그 아이들 눈이 생각난다. 나를 바라보던 천식이 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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