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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이 피폐하면 예의법도를 강요할 수 없는 법”

1. 현실은 강제적 제어 없이 굴러가지 못해
선비들은 입만 열만 왈, ‘요순의 세상’을 꿈꾸었다. 『예기(禮記)』예운(禮運)은 그 세상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천하는 공적 소유물이다. 유능하고 덕 있는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어 신뢰와 상호 존중을 구축해 나가는 사회. 사람들은 제 부모만 섬기지 아니하고 자기 자식만 품고 돌지 않는다. 노인들에게는 편안한 노년을, 젊은이에게는 일을, 어린이에게는 교육을 제공한다. 의지할 데 없는 과부, 고아, 독거노인, 장애와 질환자들에게는 쉼터가 있다. 남자는 직장이 있고, 여자는 가정이 있다. 재화를 축적하되 자기 창고에만 쌓지 않고, 노동을 하되 자신을 위해서만 벌지 않는다. 사기와 술책이 사라지고 도적과 건달이 설치지 않는 세상, 대문이 있으되 잠그지 않는 그런 세상을 대동(大同)이라고 한다.”

한형조 교수의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율곡의 『성학집요』<6>-유교의 이상사회, ‘작은 평화(小康)’의 나라


사람들과 부닥치는 것이 괴롭고, 자잘한 계산에 스스로 한심해질 때면 우리는 이런 ‘위대한 공동체’를 꿈꾼다. 한때 그런 세상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곳은 아득한 꿈이고 현실은 개인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인위적 장치가 튼튼해야 하는 곳이다. 그리하여 유교는 차선책으로 소강(小康), 즉 ‘작은 평화의 나라’를 꿈꾸었다.

“위대한 유대와 놀이(大道)가 작동을 멈추면 천하가 일가(一家)의 소유로 세습된다. 각각 제 부모만 모시고, 제 자식만 돌본다. 재화와 노력은 오직 자신만을 위해 추구되고 발휘된다. 군주와 귀족은 세습되고 성곽과 해자가 견고히 축성되는 시대, 힘과 지식을 우대하고 공적에 따른 상급이 주어진다. 지략과 경영이 시작되고 군사와 전쟁이 흥기한다.”

이 시대의 원리는 예의(禮義)이다. 구성원들의 차이와 구분을 인정하고 각각의 책임을 통한 질서를 꾀한다. “군신간의 기강, 부자간의 은의, 형제간의 친교, 부부간의 화목을 꾀하고, 제반 제도를 만들고 경작지를 경영한다. 군주는 예(禮)를 닦아 그 의(義)를 드러내고, 그 신뢰를 구축한다. 백성들에게 인(仁)의 모범을 보이고 양보를 설득해 나간다.” “군주가 이 책임을 저버리고 길을 벗어나면 백성들의 원한을 부르고, 이윽고 다른 힘과 권위에 의해 축출·교체되었다. 이 시대를 소강(小康)이라 부른다.”

2. 위대한 공동체 ‘대동’을 꿈꾼 율곡
유교는 소강의 기획 위에 서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율곡은 『율곡집』전편을 통해 ‘소강’을 언급하지 않는다. 이 사태는 놀라운데, 서강대학교의 강정인 교수가 이 지점을 짚어냈다. 정치학의 전문가다운 통찰이다. 그런데 문제는 “왜 그랬을까”이다. 나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추측해 보았다.

1) ‘소강’이 이름 그대로 너무 작지 않을까. 율곡은 늘 대동(大同), 즉 위대한 공동체를 꿈꾸었다. 소강은 그것을 ‘양보한’ 형태라서 적극 내세우지 않았을 수 있다.
2) 왕조시대에 “실패한 통치자는 축출된다”는 언급이 아무래도 걸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 율곡은 선조에게 대놓고, “자신이 없으시면 권력을 내놓고 유능한 재상에게 맡기시라”고 윽박지르던 사람이라 이 가설은 설득력이 좀 약하다. 나는 세 번째 이유에 기운다.

3. 소강은 질서가 잘 잡혀진 세상 의미
나는 그가 3)패도(覇道)를 용인했다고 생각한다. 대동이 아득한 꿈이듯이, 소강 또한 먼 길이었다. 소강은 이름과는 달리 문화적·제도적 장치를 통해 ‘잘 질서잡혀진 세상’을 뜻한다. 그러나 율곡은 피폐한 민력을 소생시키고 구법(舊法)의 폐단부터 고쳐나가는 일이 시급했다.

문화와 가치 이전에 정치적 안정과 물질적 번성이 있다. 패도는 ‘힘의 지배’ 아래 경제를 진작하고 정치외교적 안정을 노린다. 여기 군주의 인격이나 도덕적 의장은 고려하지 않는다. 맹자 이래 패도는 부도덕한 정치로 낙인찍혔다. 그러나 이 ‘안정’의 기본조차 없는 시대는 얼마나 곤고한가. 율곡은 예법을 논하는 서재의 도학자들과 달리 민생(民生)에 깊은 관심을 표했고 양민(養民)에게 힘을 쏟았다.

율곡은 “의식이 족해야 예절을 안다”고 강조했다. 민생을 위해서는 소강(小康)조차 양보할 생각이 있었다면 지나칠까. 그래서 그는 ‘소강(小康)’을 말하지 않고 다만 ‘소강(少康)’을 말한다. “조금 숨 쉴 정도의 평안과 안정”이 시급하다는 것, 그것을 위해서는 패도(覇道)의 정치조차 목마르다면서, 그것을 성취한 한 고조 유방이나 당 태종에게 경의를 표했다.

필요하다면 도덕적 설교조차 유보할 자세가 되어 있었다. 허엽이 향약(鄕約)의 시행을 건의하자 율곡은 반대했다. 민생이 피폐하고 민력이 고갈되었는데, 엄격한 예의 법도를 민간에 강요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허엽이 “사람들이 착해서 향약을 시행할 수 있다”고 하자, 율곡은 웃으며 “나는 심성이 고약해서인지, 내 눈에는 착하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이 보이오”라고 말했다.

물론 율곡이 힘과 이익의 현실주의에만 철저한 마키아벨리스트는 아니다. 그는 여전히 유교 이상주의자였다. 패도의 공렬(功烈)은 “어두운 밤에 잠시 빛나는 불빛 같은 것”이라서 영원의 안정과 번영을 보장하지는 못한다는 것, 그를 위해서는 더 큰 비전과 도덕적 이상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다만 그 성취는 현실의 여건을 고려해야 하고, 점진적 단계를 밟아야 실효를 기약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조선 유학사에서 눈은 이상을 향하되 발은 현실에 딛고 서 있던 인물은 드물다. 후생(厚生) 위에 정덕(正德)을 세우고, 도덕(道德)과 정제(政制)를 병용하는 것이 유교 본래의 기획인 점에서 율곡은 전형적이다. 그 궤적을 따라간 인물로 정도전, 정약용, 유형원, 정조를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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