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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박한 비음 섞인 웅얼거림, 그 속엔 초연함이 물씬

1965년 여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의 ‘포크록 가수’ 밥 딜런(오른쪽에서 둘째). 우디 거스리의 통기타 법통을 이어받은 프로테스트 포크의 대변자가 펼친 ‘반역의 순간’이다. 맨 왼쪽 기타리스트는 마이크 블룸필드, 맨오른쪽 건반악기 주자는 알 쿠퍼. 미국 블루스 록의 거대한 뿌리들이다.
후딱 30년이다. 1979년 10.26, 그즈음이 슬펐던 이유는 따로 있다. 순전히 밥 딜런(Bob Dylan)의 ‘One More Cup of Coffee’ ‘I Shall Be Released’ 두 노래 때문이다. 연합고사를 코앞에 둔 중3 까까머리 철부지 시절이었으니 너무 눈 흘기진 말아주시길. 대전 중앙시장 근처에 있던 단골 음반 가게(지금은 사라진) 주인장의 꼬드김에 주머니 털어 손에 쥔 밥 딜런 ‘빽판’(불법 LP판) 두 타이틀. 그 앨범은 바로 ‘Desire’(76), 도쿄 부도칸에서의 78년도 라이브 ‘At Budokan’이다.

박진열 기자의 음악과 '음락' 사이- 밥 딜런 5집 앨범 ‘Bringing It All Back Home’(1965)

앞 곡은 낑낑 울어대는 바이올린 선율과 딜런의 코맹맹이 목소리, 거기에 에밀루 해리스의 애달픈 추임새가 만나서인지 당시 방송을 뒤덮던 여느 레퀴엠처럼 들렸다. 라이브인 뒷 곡은 전축 턴테이블 바늘이 속절없이 툭툭 튀는 바람에 나를 슬프게 했다. ‘그분의 유고’로 한 시절이 저물던 무렵, 나는 평생 친구 밥 딜런과의 행복한 한 시절을 시작했다.

쳇 베이커(재즈 트럼펫·보컬·1929~88) 음악에선 청춘 냄새가 난다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한 게 생각난다. 나는 밥 딜런 노래에서도 이 분의 음색과 기타, 하모니카 연주가 아니고는 표현할 수 없는, 창백해서 되레 청신한 청춘의 숨결이 느껴진다(물론 쳇 베이커 경우엔 추락사한 비극적 파멸성이 오버랩 되지만). 내일 모레면 칠순의 연세, 호두알 껍질처럼 변해가는 밥 딜런의 요즘 얼굴에서도 기타를 둘러멘 혈기방장하던 그때의 그가 떠오른다.

밥 딜런(본명은 로버트 앨런 짐머만, 영국 시인 딜런 토머스 이름에서 따옴), 이름 석 자를 세상에 드높인 드센 저항의 노랫말도 좋지만 뭉근한 은유에 난 더 끌리는 편이다. 가령, 흑인 민권운동과 쿠바 미사일 위기로 싹튼 대학생들의 반전 기운에 사로잡힌 미네소타 출신 시골총각 딜런, 그가 부른 반전 시대의 송가 ‘Blowin’ in the Wind’(63년 2집 수록)는 나직한 내적 성찰의 힘으로 마음을 열게 한다.

"…포탄이 전쟁터를 얼마나 많이 날아다녀야 영원한 평화가 찾아올까/ 친구여, 그건 바람만이 알고 있어.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다네/ 얼마나 긴 세월이 흘러야 산이 씻겨서 바다로 내려갈까/ 얼마나 긴 세월이 흘러야 사람은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스물두 살 청년의 웅숭깊은 달관 좀 보라. 약자들의 눈물을 위로하는 한편 사회적 무관심을 ‘바람’에 빗댄 경종이라니. 놀랍지 않은가.

딜런이 오마주한 우디 거스리(1912~67)와 피트 시거(1919~)는 미국 포크의 큰 바위 얼굴이다. 우디 거스리가 누구신가. 그는 사람 살만한 세상을 노래로 꿈꾸던 아메리칸 포크의 아버지이시다. 컨트리 음악의 메시지가 보수적이라면 포크는 진보적이고 사회성까지 녹아있다. 50년대 초 매카시즘 광풍의 희생자, 피트 시거는 좀 각별하다. 홀로 기타 치며 부른 그의 ‘아리랑’ 버전 ‘Ariran’(50년 라이브 추정) 덕이다. 꽤 구수하다. 지방색 짙은 민속풍의 영국 포크와 달리 미국 포크는 이처럼 프로테스트의 DNA가 숨쉬고 있다. 여기서 포크의 비상업적 순수성 이데올로기가 비롯됐다.

노랫말에 담긴 진솔한 메시지를 투명하게 전달하는 데는 어쿠스틱 기타, 밴조, 피들 정도의 편성만 한 게 없었지 싶다. 이랬으니 ‘포크 순혈주의자’들이 65년 7월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오른 밥 딜런에게 야유와 함께 달걀 세례로 답한 건 어쩌면 당연했으리라.

딜런은 노래를 무기로 한 정치투쟁과 젊은이들의 대변인 노릇을 슬슬 스스로 관두게 된다. 4집 ‘Another Side of Bob Dylan’부터다. 자신을 ‘투사’로 여기는 사람들의 기대가 버거웠기에(언젠가 그는 “난 예언자나 구세주가 되는 걸 결코 원치 않았고 내가 대변하게 됐다는 그 세대를 잘 알지도 못했다”고 질색했다). 뭐랄까,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린 노래를 단지 후위에서 불렀을 뿐인데, 시대가 그로 하여금 신화적인 전위로 만들었다고나 할까(바로 여기가 딜런이 더욱 위대해 보이는 대목이다, 적어도 내게는).

어쨌든 그는 갑갑했다. 새로운 형식을 고민하던 딜런은 65년 봄 드디어 어쿠스틱 포크에서 일렉트릭 포크 록으로 변신을 감행한다. 아까 말한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 직전, 5집 앨범 ‘Bringing It All Back Home’이다. ‘그러나’ 라고 해야 할지, ‘그래서’ 라고 해야 할지, 거장은 뭘 해도 거장이다. 수록곡 중 언제 들어도 흐뭇한 사랑노래 ‘Love Minus Zero/No Limit’를 나는 특히 좋아한다. 가냘픈 듯 투박한 비음 섞인 웅얼거림에는 초연함이 묻어있다. 기름기 좔좔 흐르는 당시 스탠더드 팝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마리화나를 연상시키는 모호한 노랫말의 ‘Mr. Tambourine Man’은 내면 풍경을 차분하게 읊조린다.

바야흐로 록의 시대가 도래한 그곳, 딜런의 예지력은 딱 들어맞았다. 이후 쏟아내는 걸출한 명반들, 이를테면 ‘Highway 61 Revisited’(65), 상큼한 소품 ‘I Want You’가 반가운 ‘Blonde on Blonde’(66, 밥 딜런 자신이 가장 아낀다는 앨범), 오토바이 사고 후 돌연 컨트리 록으로 지평을 넓힌 음반 ‘John Wesley Harding’(67) 등등. 황홀한 걸작 퍼레이드다.

한데 80년대 중반 이후의 딜런은 어쩐지 그닥 즐겨 듣지 않는 편이다. 사그라지는 별똥별의 광휘랄까. 내 머릿속엔 늘 그의 고뇌에 찬 젊은 날의 눈부심, 고독과 저항의 변주가 워낙 강렬하기 때문이다. 시대의 부름을 외면하지 말라며 몰려든, 베트남전 반대 시위대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총까지 준비했던 소시민. 이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까지.

여담이지만 DJ 배철수씨의 코멘트에 뻥 터진 적이 있다. “사실 이런 대가의 음악엔 평을 하기가 참 어렵다. 잘못 ‘까대다간’ 음악계에서 개념 없는 인간으로 찍힐 수 있기 때문.…가창력이 떨어지는 가수들에게 심어준 긍정적인 효과는 정말 엄청나다.” 활주로, 송골매 그룹 시절 그가 들려준 노래솜씨를 떠올려 보면 “나름 ‘엣지’ 한번 근사했어요, 배철수씨”라 말하고 싶은데….

대중음악 역사에 이름을 남긴 멋진 뮤지션들, 밤하늘 별만큼이나 총총하다. 허나 1960년대는 가히 밥 딜런과 비틀스 시대였다. 딜런이 반골의 자유인이자 위대한 싱어·송라이터라면, 비틀스는 ‘제대로 된’ 최초의 싱어·송라이터 밴드였다. 롤링스톤지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2위와 1위로 각각 꼽았던 걸 보면 그 존재감, 얼추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50년을 내달려온 밥 딜런의 풍요로운 음악적 수맥은, 특히 60년대라는 드넓은 들판 구석구석을 촉촉하게 적신 마중물이 됐다.

이제 그의 음악은 포크와 컨트리, 록큰롤 그리고 블루스의 사이 그 어디쯤에선가 빛나고 있다. 20세기 대중문화의 아이콘, 그가 지난달 31일에야 한국 무대에 처음 올랐다는 게 내심 씁쓸하다. ‘어쩌자고 이제야 다녀가십니까.’그때 거기, 밥 딜런이 없었다면 이 땅엔 김민기, 양병집, 한대수 또한 없었으리라. 자- 다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왜? 바로 그는 ‘밥 딜런’이니까.

박진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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