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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의 線에서 찾은 禪의 세계

1 서해안 옹진군에 속한 굴업도의 아름다운 산세를 담은 39sea1a-041h39(2010),181306㎝
사진작가 배병우(60)의 작업실은 경기도 파주시 헤이리 예술인촌에 있다. 3월 하순 이곳을 찾았을 때 작업실 안은 바깥보다 더 추운 듯했다. “서울보다 6도 이상 낮아요.” 검정색 파카에 초록색 목도리를 두른 그가 털 실내화를 내주며 말했다. “난방을 계속 하면 감당이 안 돼서 그냥 좀 춥게 삽니다.”

앨튼 존도 반한 ‘소나무 사진작가’ 배병우를 만나다

2 배병우 작가 의 소나무 사진을 사용한 2010 잘츠부르크 음악 축제의 포스터
회색 콘크리트 2층 건물 두 개가 연결된 적당한 크기의 공간. 이곳에서 일한 지도 어느새 6년째다. 천장이 높은 1층 한 켠엔 탁구대와 피아노와 노래방 기기가 보였다. 조수들과 운동도 하고 이곳을 찾는 친구들과 한 잔 마시며 놀기도 하는 곳. 여전히 필름 작업을 고수하는 그에겐 암실 역시 소중한 공간이다. “요즘 이만한 암실 거의 없을 겁니다.” 시큼한 약품 냄새가 추억이 되어 코를 찌른다. 옛날 편집국 사진부 한구석에 고여있던, 그 냄새다.

계단을 올라 작은 침실들을 지나자 ㄴ자 모양의 널찍한 공간이 나타났다. 바람벽마다 책으로 가득했다. 대부분 사진 책들이었는데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우키요에’나 각종 ‘풍속화’ 책들도 제법 눈에 띄었다.

-책이 많네요.
“전 사진과를 나오지 않았어요. 게다가 국내파(홍익대 응용미술학과 졸업, 공예도안학과 석사)죠. 그런데 선생(1981년 서울예술대 사진과 창설멤버)이 됐습니다. 자료가 필요했어요. 이 책들은 1970년대부터 모은 것들입니다. 미국문화원, 영국문화원, 프랑스문화원과 서울대·이대·홍대 도서관 등을 돌아다니며 좋은 책들을 찾아 연구했죠.”

3 작업실 2층의 서재 겸 부엌에서 요리하는 배병우 작가
그는 세계에서 1만5000부가 팔렸다는 그레고리 크로드슨(Gregory Crewdson)의 작품집, 펼치면 거의 경차 보닛만 한 헬무트 뉴튼(Helmut Newton)의 한정판 작품집(그의 책은 1만 부 중 3903번째로 3000만원이 넘는다고 한다), 미야자와 리에의 누드 사진집 『산타페』로 유명한 시노야마 기신의 작품집 등을 하나하나 꺼내 보여주었다.

-연초에 출간된 『창덕궁』(컬쳐북스)은 많이 팔렸나요? 35만원짜리 고가사진집인데.
“한 250권쯤 팔렸는데, 200권은 지인들이 샀고 서점에서 팔린 것은 50권 정도예요. 500권은 팔려야 제작비가 나온다는데…. 허허.”
-독일의 전문 출판사인 하체 칸츠(HATJE CANTZ)가 발간한 소나무 사진집 『성스러운 나무(Sacred Wood)』는 어떻습니까.
“그건 5000부 정도? 그런데 그 책에 실린 사진이 올해 제90회 잘츠부르크 음악축제(7월 25일~8월 30일)의 포스터에 쓰이게 됐어요. 올해의 주제가 ‘인간과 신은 어디에 있는가’인데 마침 사진집을 보고 사람 인(人)자 같은, 사람이 걸어가는 것 같은 소나무 사진을 골랐더라고요.”

소나무에서 ‘사람’을 찾아낸 잘츠부르크 조직위의 안목은 “배병우가 찍은 자연에는 사람의 기척이 있다”고 간파한 일본인 큐레이터 지바 시게오의 지적과 일맥상통한다. 그가 자연에서 사람의 기척을 느끼는 순간은 보통 새벽이다. 햇살이 막 퍼지기 시작해 대지가 기지개를 펴는 순간, 그 몇 초간 찰나에 일어나는 자연의 심호흡을 나꿔채기 위해 그는 새벽 3시30분이면 집을 나서 일출 1시간 전부터 트라이포트에 카메라를 앉혀놓고 ‘스탠바이’에 들어간다. 그렇게 40년을 살아왔다.

“젊었을 적에 하이데거의 어떤 책에서 ‘매일 아침을 맞이하지만 그 태도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어요. 새벽에 산을 오를 때마다 그 대목을 떠올립니다. 그러면서 피사체에 꾸준히 집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 느낌이 오죠.”
그는 자신의 ‘집중력’을 믿는다. 어릴 적 일화 하나. 고등학교 때 동네 깡패에게 얻어맞은 소년 배병우는 미친 듯이 유도에 몰두했다. 마침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유도선수였다.“1년 만에 여수를 제패했죠. 그때 내 라이벌이었던 광주 대표가 최종삼(62) 전 유도 국가대표 감독(현 용인대 기획처장)입니다. 집중적으로 열심히 하면 된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죠.”

동네 선배의 권유로 시작한 사진. 전공인 디자인은 뒤로 한 채 “사진은 빛 그림이며 카메라는 연필”이라는 헝가리의 조형주의 예술가 모흘리 나기(1895~1946)를 정신적 스승으로 모시고 독학했다. 그리고 80년대 중반부터 백두대간과 고향 여수의 바닷가, 그리고 경주의 왕릉과 제주의 중산간을 오르내렸다. 왕릉 소나무에서 제왕의 기품을 발견했고, 부드러운 오름의 곡선미에 반했고, 바다와 바닷가 하늘의 미묘한 색조에 점점 빠져들었다. 그리고 세상은 그의 작품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그는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를 거론하며 “성공에는 시대적 운도 필요하다”고 말했다(주지하다시피 글래드웰은 대성공의 조건으로 본인의 재능, 1만 시간의 노력, 그리고 그런 재능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시대적 상황의 세 가지를 꼽았다).

“90년대 들어 사진계의 유행이 스트레이트 사진으로 돌아오고, 지구온난화 문제가 불거지면서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한 이탈리아 친구가 제 사진을 보고 ‘넌 신 낭만주의구나’라고 해요.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그린 독일의 낭만주의 화가 캐스퍼 데이비드 프리드리히(1734~1840)가 떠오른다는 거예요. 자신들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자연에 대한 느낌을 되살려주었다는 거죠.”그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아무래도 2005년 엘튼 존이 런던 로열아카데미 사진시장에서 그의 소나무 사진을 1만5000파운드(약 2600만원)에 구입하면서부터일 터다. 그 뒤로 그의 사진은 수천만원대로 폭등하며 각종 아트페어와 경매시장에서 빠지지 않는 인기 품목으로 자리 잡았다.

“엘튼 존은 그 사진을 루이지애나 별장 로비에 걸어놨대요. 그 뒤로 국내는 물론 외국에도 많이 팔렸죠. 망고, 시슬리 등에서도 구입했어요. 특히 지중해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얼마 전에는 세계 최고의 컬렉터 중 하나로 꼽히는 악셀 베르보르트(Axel Vervoordt)가 그를 찾아왔다. 지난해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공개한 자신의 컬렉션전에 배 작가의 소나무 작품도 있었는데, 한국을 좀 더 보고 싶다고 했단다.

“우선 해인사를 데려갔죠. 팔만대장경을 보더니 ‘세상에 이런 라이브러리가 어디 있느냐’고 경탄해요. 자연바람으로 천 년을 보존해온 게 너무 놀랍다면서. 경주에 있는 손씨 종가를 비롯해 우리 전통이 살아있는 몇 곳을 보여줬더니 뭐라는지 아세요. ‘한국이 키워드다’, 이래요. 중국과 일본과는 또 다른 한국만의 미가 대단하다는 거죠.”

점심 무렵이 되자 한참을 얘기하던 그가 서재 가운데 있는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더니 직접 청국장을 끓이기 시작했다. 인근 유명한 청국장집에서 사온 것이라고 했다. 냉장고에서 갓김치를 꺼내고 곧이어 구운 꽁치를 가지고 조수들이 올라왔다. “자, 맛있게 먹읍시다.” 어릴 적부터 부엌에서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고 그는 말했다. “국민학교 땐 약국에서 이스트를 사다가 빵을 만든 적도 있어요. 요리를 잘한다기보다 아이들과 생존을 위해 그냥 해먹는 것이죠.”

그러고 보니 책꽂이에 세계 최고 식당으로 불리는 엘 불리의 하루를 다룬 『A Day at El Bulli』를 비롯해 『섹스, 파스타, 그리고 거짓말』『배갈을 알아야 중국이 보인다』 같은 음식관련 책들도 여럿 보였다. “친구들이 온다고 하면 5일 전쯤 고향에 있는 누나나 여동생한테 여수에서만 나는 맛있는 것들, 예를 들어 새조개나 돔 종류인 군풍생이, 노랑가오리 등을 보내라고 합니다. 그럼 제가 요리를 해서 대접하죠. 여기서 200여 명이 한꺼번에 파티를 한 적이 있는데 그날 와인 300병을 마셨더라고요.”

그는 소문난 와인 애호가다. 한 국내 화랑은 라벨에 그의 이름을 붙인 와인을 만들기도 했다. “미술시장 경기가 좋았던” 시절 얘기다. 지하엔 와인셀러가 4대나 있다고 했다. 인물 사진은 안 찍기로 유명한 그가 첼리스트 양성원의 CD용 컷을 찍어주게 된 것도, 최고의 소믈리에로 꼽히는 양씨와 와인을 마시다 술김에 한 약속 때문이라고 껄껄 웃는다. 1층 피아노를 자주 애용한다는 노영심을 비롯해 소리꾼 장사익, 음악인 김수철, 영화감독 김기덕, 시사평론가 조갑제, 시인 박노해 등 다양한 경향의 문화예술인들이 그의 작업실을 자주 찾아오는 이유는 요리와 와인과 그리고 작가가 만들어내는 사람내음 덕분인지도 모른다.

식사를 마치고 이러 저리 둘러보다 김수영 시인의 시 ‘풀’이 적힌 액자를 발견했다. “김수영 시인이 11년 전 죽은 아내의 이모부예요. 그 시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고요.” 지난해 가을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대규모 개인전을 성황리에 마친 그는 올 들어 제주와 서해안 굴업도 등에서 다시 새 작업에 몰두해 왔다. 서울 서소문 일우스페이스 개관전(4월 8일~6월 6일)을 위해서다. 일우스페이스는 한진그룹의 사회공헌 활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사진미술 전문 갤러리로 대한항공 서소문 사옥 1층에 마련됐다.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정동극장, 호암아트홀, 국제교류재단, 로댕갤러리로 이어지는 ‘서소문 아트존’의 새로운 축으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최근 골프장 건설 논란이 일고 있는 굴업도가 기실 얼마나 아름다운 섬인지, 제주의 새벽 바닷가의 파도와 하늘이 얼마나 오묘한 색깔과 모양을 만들어내는지 수묵화의 질감으로 고스란히 보여준다.

“나무가 제대로 품격을 갖추려면 100년은 자라야 합니다. 그러니 수백 년 된 나무를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이죠. 절경의 해안선도 하루 이틀에 이뤄진 것은 아닙니다. 조셉 캠벨은 『신화의 힘』에서 인디언 추장이 조지 워싱턴에게 보내는 편지를 인용했어요. ‘땅은 사고파는 게 아니라 공유하는 것이다. 우리를 쫓아내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 대지를 사랑해달라’고요. 제 마음도 그와 똑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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