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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69) 인천상륙작전 뒤의 국면

공격에는 보급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 ‘나물 캐 먹고, 물 마시는 식’의 느슨한 방법으로는 규모가 큰 현대전을 제대로 치를 수 없다. 병력과 화력은 물론이고 병사들이 소비하는 음식과 모든 장비가 반드시 따라야 전쟁을 제대로 치를 수 있는 법이다.



“낙동강에서 반격해 북상하라” 맥아더 밤낮없이 독촉

북한군에게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1950년 9월 15일, 조수간만의 차이가 12m나 되는 인천으로 미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하리라고는 충분히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은 뭍으로 병력을 올려 보냈다. 상륙작전의 주력인 미군 10군단은 미 7사단과 미 해병 1사단, 국군 17연대와 대한민국 해병 1개 연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막대한 병력이 세계 최고의 수준인 화력을 지니고 인천으로 올라선 것이다.



북한의 주력은 낙동강 전선에 있었다. 서울과 인천, 평양 등지에도 강력한 부대가 배치됐다고 하지만 남한을 적화하기 위해 막바지 공세를 펼치면서 진짜 북한군 주력은 낙동강 전선에 대거 몰려 있었다. 북한 지역으로부터 낙동강 전선까지 이어지는 게 북한군의 보급선이었다. 그 중간이 끊기게 됐다. 인천을 통해 뭍으로 올라온 미군이 그 중간을 자르기 위해 공격해 온 것이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미군이 인천 월미도에서 서울 진군 채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에서는 아군의 반격이 미뤄지고 있었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성망(聲望: 좋은 평판)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문제가 남아 있었다. 미 10군단의 예하 부대들은 서울로 진군했다. 미 1해병사단은 김포비행장을 거쳐 행주나루~연희고지를 목표로 움직였다. 미 7사단은 광나루~망우리를 거쳐 서울 복판으로 진입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배후가 문제의 핵심이었다.



일단은 낙동강 전선에 남아 있던 적의 주력을 경계해야 했다. 이들이 인천으로 상륙한 미군의 뒤를 공격해 오면 큰일이 벌어진다. 그런 점에서 낙동강에서 그들과 대치하고 있던 국군과 아군이 이들을 반드시 제거해야 했다.



낙동강 전선의 아군에게는 뚜렷한 공격 목표가 세워져 있었다. 낙동강 방어선 X축선의 미 9군단(2사단과 25사단)은 호남으로 진격하는 임무가 맡겨졌다. 한국군 2군단(6사단과 8사단)은 원주를 경유해 화천까지 밀고 올라가는 작전을 수행해야 했다. 국군 1군단의 3사단은 긴 동해안을 따라 진격하고 그 좌측은 수도사단이 맡았다.



미 1군단이 핵심이었다. 우리 1사단은 프랭크 밀번이 이끄는 미 1군단에 배속됐다. 가장 중요한 경부축선으로 진격하는 게 임무였다. 미 1군단이 반격에 성공해 낙동강 전선에서 북상하기 시작하면 인천상륙작전은 최고의 효과를 거두게 된다. 그 반대로 미 1군단의 반격이 실패한다면 적의 주력은 인천으로 상륙한 미군을 배후에서 공격함으로써 상륙작전 자체를 실패로 몰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미 1군단의 반격은 그래서 중요했다. 맥아더의 담대하기 짝이 없는 인천상륙작전도 미 1군단의 반격이 실패한다면 도로(徒勞)에 그치고 만다. 따라서 맥아더의 반격 독촉은 낙동강 전선의 미 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 1군단장 프랭크 밀번에게 사정없이 날아들고 있었다.



8월 17일이었다. 잘 갈아진 칼을 가슴에 품고 반격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내게 워커 중장이 찾아왔다. 나름대로 적의 방어선을 뚫기 위해 절치부심했지만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였다. 번쩍거리는 헬멧을 쓰고 지프차에서 내린 워커 장군은 다짜고짜 내게 “백 사단장, 우회(bypass) 전술이라고 들어 봤나”라고 물었다.



백선엽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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