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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때 산성은 맞지만 … ” 2000년 전 온조의 흔적은 못 찾아

2일 위례산 정상에서 제1차 발굴 자문회의가 열렸다. 많은 참석자들이 “ 백제 첫 도읍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선 정상보다 산 아래쪽으로 발굴을 확장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발굴 현장을 둘러보는 참석자들(왼쪽)과 위례성 서북쪽에 남아있는 성곽 모습(오른쪽).
하늘에서 바라 본 위례성 발굴현장 및 약도.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제공]
# 천안시의회는 2일 임시회 본회의에서 ‘위례 명칭 사용 변경 촉구 건의문’을 채택하고 국토해양부에 제출하기로 했다. 서울 송파구와 성남시 일원에 추진 중인 신도시 이름을 ‘위례신도시’로 하려는 움직임에 제동을 건 것이다. 천안시도 지난달 국토해양부 등에 “백제 첫도읍지 위례성의 위치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위례신도시’ 명칭을 사용할 경우 국민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는 건의문을 냈다.



천안 성거산 위례성 발굴 보고회

# 천안시가 오는 9월 공주·부여에서 열리는‘2010 세계대백제전’의 성화(혼불)는 당연히 백제 첫 도읍지인 천안 직산의 위례성에서 채화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충남도가 혼불을 학계에서 백제 첫 도읍지로 거론되는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에서 채화한 뒤 공주·부여로 봉송하는 방안을 마련한 데 따른 것이다.



천안시는 수년 전 부터 백제 시조 온조의 첫 도읍지가 천안 위례성임을 밝히는 작업에 힘을 쏟고 있다. 올해 북면 운용리 소재 성거산(일명 위례산) 정상의 위례성 발굴에 나섰다. 공주에 있는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이 1,2차로 나눠 2400㎡(727평) 지역을 발굴하고 있다. 충청남도와 천안시가 각각 4억원씩 예산을 댔다.



1차 발굴은 지난해 11월부터 5월 20일까지 진행된다. 2일 오전 10시 발굴현장에서 1차 자문위원회가 열렸다. 발굴을 마무리하기 앞서 그간 성과를 발표하고 자문교수들 의견을 듣는 자리다.



천안 위례성 조사는 1989년과 1995년,1996년 서울대 인문과학연구소(임효재 서울대 명예교수·고고학)에 의해 이미 세 차례 진행된 바 있다. 당시 성내에서 통일신라 유물과 함께 백제 유물이 확인됐다. 그러나 2,3개월에 걸친 시굴(試掘)이었고 본격적 발굴은 이번이 처음이다.



백제때 성곽임은 확인했으나…



천안 위례성(위례산성)이 백제시대 처음 만들어진 성인 것을 재확인했다. 위례성은 현재 입장면·북면에 경계지점에 있으나 조선시대엔 이 지역은 직산현(縣)에 편입돼 있었다. 서울대팀 조사 때와 같이 백제시대 토기편이 발굴됐다. 토기의 쇠뿔(牛角)형 손잡이와 삼족기(三足器)의 다리 일부분이 서쪽 성벽 안쪽에서 나왔다. 세발토기로 부르기도 하는 삼족기는 백제가 한강 유역에 도읍을 두고 있던 한성시기(기원전 18~기원후 475년)때부터 꾸준히 사용한 특징적 토기다.



위례성은 통일신라·고려시대 토기도 다수 나오는 것으로 보건대 오랜 시기 동안 보수 과정을 거쳐 가며 산성 기능을 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성벽 위에서 적을 공격할 때 몸을 엄폐하는 여장(如牆)시설도 찾아냈다.



발굴에 참여한 최병화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성 가운데 평평한 지역 생활유적에선 부속시설로 사용된 석재 일부와 불을 지폈던 불길 흔적도 부분적으로 확인했다”며 “현재 발굴 결과로선 위례성의 처음 축조 시기를 최대 4세기 말까지 올려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우물터에 대한 조사 보고도 있었다. 우물터 뒷편으로 돌이 줄지어 있는 석렬유구가 나왔다. 또 그 왼쪽에선 주춧돌을 올리기 위해 잔자갈을 다진 적심(積心)유구를 확인했다. 이곳에서도 삼족기 등 백제 토기가 나왔다.



첫 도읍지 가능성 열어두고 더 조사를



발굴 조사 보고에 이은 자문위원 회의에서 많은 의견이 나왔다.



“위례성은 평지성의 배후산성적 성격이 짙다. 향후 백제 첫 도읍지설을 확립하기 위해선 평지성을 찾는 조사 계획이 수립돼야 한다.” 한밭대 심정보 교수는 덧붙여 “우물터 석렬유구는 물을 모으는 집수지(集水地)시설인 것 같다”며 “집수지 부근 발굴이 위례성 초축(初築)시기를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공주대 정재윤 사학과 교수는 “위례성이 직산에 있었다는 건 『삼국유사』에 처음 나오는데 지은이 일연이 아무 근거 없이 그렇게 썼을리 없다”며 “첫 도읍지 가능성은 열어놓고, 궁궐이 있기 힘든 산 정상의 위례성이 아니라 그 아래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지금까지 밝혀진 위례성 초축시기(5세기)로 보건대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를 막기 위해 만든 성이 아니겠느냐는 견해를 내놨다.



발굴에 참여했던 단국대 이종수 역사학과 교수는 “하반기 실시될 2차 조사에선 위례성 문지(門址)로 추정되는 4,5곳에 대한 시굴 조사 등이 이뤄질 것”이라며 “온조의 어머니인 소서노 무덤으로 민간에서 전해지는 돌무지를 조사해 적석총 여부를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향토사학자들도 의견을 내놨다. 장성균 천안문화재연구소장은 “도읍지 평지성과 관련, 직산 사산성 인근에 말안장터에 대한 조사가 시급하다”며 “입장면 오리골도 도읍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발족한 (사)백제위례성보존사업회 방인충 이사장은 “인근 입장 호당리에서 오래 전부터 소서노 추모제를 지내온 사실 등을 볼 때 백제 첫 도읍지가 이곳이라는 사실에 신뢰가 간다”며 “이 일대를 공원으로 잘 꾸며 관광자원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밝혔다.



황인석 천안일보 대표는 “위례산 남쪽 기슭에는 적석총이 많이 있다”며 “북면 납안리 골프장 건설로 훼손되기 전에 본격적인 조사가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황 대표는 정상의 위례산성이 주곽(主郭,내성)이라면 산 기슭에 부곽(副郭, 외성)이 있었다면서 부곽 발굴의 시급성을 강조했다.



사회를 맡은 강종원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연구위원은 “지역민들의 열정이 발굴 작업에 적잖은 부담을 주는 게 사실”이라며 “그러나 그 열망과 조사 결과가 항상 일치할 수 없어 안타깝다”고 소회를 밝혔다.



향토사학계에선 삼국사기 등을 근거로 온조가 직산 위례성에 기원전 18년 첫 도읍을 정한 후 13년간 있다가, 기원전 5년 오늘의 경기도 광주(漢山)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보고 있다.







글·사진= 조한필 기자



직산이냐 서울이냐?

일연 ‘한마디’에 수백년간 논란 … 정약용·신채호 등 직산설 부정




『삼국유사』에 ‘위례는 지금의 직산’(오른쪽 줄친 곳), ‘한산(지금 광주)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쓰여있다.
백제 첫 도읍지 직산설은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1206~1289)으로부터 출발한다. 일연은 ‘남부여 전백제(南扶餘 前百濟)’조에서 ‘위례금직산(慰禮今稷山)’, 즉 위례는 지금의 직산이라고 쓰고 있다(오른쪽 사진). 백제 건국 이야기를 『삼국사기』(1145년 발간) 내용을 근거로 거의 베끼다시피 서술한 뒤 느닷없이 온조가 도읍한 위례성이 천안의 직산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이후 지금껏 백제 위례성이 한강 부근이냐 직산이냐를 두고 수백년 간 논란을 빚고 있는 것이다. 일연 이후 조선 초기 여러 글에서 직산 위례성설이 선을 보인다. 1454년 펴낸 『세종실록지리지』 직산현 조에 “본래 위례성으로 백제시조 온조왕이 도읍을 정해 나라를 세웠다”고 했다.



동국여지승람(1481년)을 보완해 펴낸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직산현 건치연혁조 내용은 세종실록지리지에 글자 몇개를 바꾼 정도로 같다. 특이하게 서거정(1420~1488)이 지은 ‘제원루(濟源樓)시’ 서문을 싣고 있다.



“이 고을은 백제의 옛 도읍이니 누각 이름도 백제의 근원이란 뜻으로 지었다…(온조가 올라가 도읍을 정했다는)부아악은 200리 떨어진 곳인데 어떻게 여기가 능히 살만한 곳으로 잡을 수 있겠는가…이곳은 지세가 편협해서 도읍을 세울 곳이 못된다. (그러나) 삼국사절요를 편찬하면서 여러 책을 봤는데 직산이 백제 첫 도읍임은 의심할 바 없다.”



오래전 이병도 박사가 지적했듯 서거정은 처음엔 도읍지임이 의심스럽다고 하다가 말을 바꿔 직산이 분명 백제 첫 도읍지라고 횡설수설하고 있다.



직산 위례성설은 조선 후기 지도에선 정설로 굳혀지는 듯 했다. 1760년대 나온 『여지도서(輿地圖書)』, 1837년 『청구도(靑丘圖』등은 직산에 위례성을 표기하고 있다. 하지만 1850년대 들어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대동지지』등에선 위례성을 백제 도읍지가 아니라 ‘성거산 고성’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직산 위례성이 백제 초도지가 아니라고 논증한 데서 비롯된 듯 싶다. 다산은 직산에 위례 명칭이 남은 까닭을 문주왕이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 공격으로 한성에서 공주로 도읍을 옮기면서 일시 머물렀던 데서 비롯된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다산은 1811년 펴낸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백제 피난 세력이)직산에 머물면서 북쪽으로 옛 도읍의 소식을 듣고, 남쪽으로 새 도읍(공주)의 일을 처리했음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고 했다.



그후 단재 신채호는 그보다 앞선 4세기 말 광개토왕의 한성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백제가 일시 직산으로 천도해 위례 명칭이 사용된 게 아닌가 내다봤다. 이병도 박사는 삼한시대 마한의 중심국인 목지국 소재지가 직산이었는데 이 사실이 와전돼 백제 도읍지로 잘못 인식된듯 싶다고 추측했다.



한국사학계는 이같은 ‘직산 위례성설 부정’을 받아 들여 위례성을 한강 부근 서울·경기도 광주에서 찾은지 오래다. 서울 송파구의 몽촌토성, 풍납토성과 광주 춘궁리 등을 놓고 수십년간 갑론을박했다.



이후 10여 년 전부턴 풍납토성에서 왕경 추정 유적이 발굴되고 기원전 1세기 토기와 ‘대부(大夫)’명문토기 등이 나와, 풍납토성의 하남위례성설이 힘을 얻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위례성 부근엔 온조왕 관련 지명 수두룩



위례산 정상(523m)의 산성에 가려면 천안 입장면에서 북면으로 이어지는 57번 지방도 부수문이고개에서 올라가야 한다. 지난해 직산초등학교 동문회에서 돌기둥 표지를 세워 입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가파르지 않은 산길을 2.4km 가면 된다.



“위례산의 용샘 전설은 백제왕이 백마강 수중 용으로 변해 파도를 일으켜 당나라 군대를 막은 것과 익산 미륵사에서 용(무왕)이 연못을 통해 출입했다는 전설과 일맥상통한다.”



충남대 황인덕 국문학과 교수는 백제연구소가 2003년에 펴낸 『위례산성』에서 일대 지명에 얽힌 전설을 전하고 있다. 전설은 역사와 고고학이 발혀내지 못한 많은 사실의 단서를 제공하고 있어 유용하다.



용샘으로 추정되는 위례성 우물(위), 출토된 삼족기 다리(아래 왼쪽 사진의 가운데)와 쇠뿔형손잡이. 지난해 부수문이고개에 세워진 돌기둥 표지.
부수문이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할 때 이곳에 문을 세웠다고 한다. 또 이름 유래를 위례산 옆 산 부소산(扶蘇山)에서 찾기도 한다.



온조왕묘 세조 11년 직산고을 동북쪽 3리에 세웠다. 지금의 직산 군동리 산 8-3 지역으로 정유재란때 불타 사라졌다. 그 뒤 당집을 지어 제를 올렸으나 6·25 때 미군이 헐었다.



지질캥이 성환읍 수향리의 으뜸 마을로 지족향리(知足鄕里)라고 쓴다. 백제때 재상들이 물러나 이곳에 거주하면서 ‘이만하면 족하다’는 뜻으로 지었다.



구시랑이 입장면 시장리 도장골 서쪽의 골짜기. 백제 때 시랑(벼슬이름) 아홉 명이 살아다고 한다.



붉으물 입장면 용정리 으뜸 마을이 붉으머리인데 이 마을 우물을 이렇게 부른다. 백제 때 나라에서 쓰는 샘으로 삼고자 샘 둘레에 쇠를 둘렀다고 한다.



군단이 북면 운용리 마을로 백제 군대가 주둔하던 곳이라고 한다.



장생이 군단이 서북쪽 골짝의 마을. 백제 때 시장이 열리는 곳.



곡간리 북면 대양리의 마을로 백제 때 곡식을 쌓아 뒀던 곳간(곡간)이 있었다.



깊은골 북면 운용리 부소문이 고개 동쪽의 깊은 골짝. 물이 좋아 전염병이 없었다. 온조가 처음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구수바위 위례성 내에 있는 구유처럼 생긴 바위. 온조왕이 쓰던 것.



유왕골 목천면 덕전리 점말 북쪽의 마을. 온조가 봄여름이면 이곳에 머물면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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