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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창훈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 (25) 토의채(土衣菜·톳)

한 뿌리에서 한 줄기가 난다. 잎은 금은화의 꽃망울을 닮아 가운데는 가늘고 끝은 두툼한데 속이 비어 있다. 맛은 담담하고 산뜻하다. 삶아 먹으면 좋다(부분 생략).



살려고 먹었다, 요즘엔 몸 챙기려 먹는다, 세월 많이 갔다



톳은, 지금은 나물로 많이 먹지만 곡식이 부족하던 옛날엔 밥도 해 먹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대부분 가난했다. 그러면서도 앞 세대의 가난 이야기를 귀 아프게 듣고 컸다. 들은 바로는 혹독했다. 가장 흔했던 게 소나무 속껍질을 벗겨 먹었다는 것이다. 누구네 며느리가 덜 우린 송피를 먹고 산처럼 부어 올랐는데 지금의 몸매가 그때 만들어진 거라고도 하고, 옆 마을 어떤 가족은 칡뿌리만 갉아먹은 탓에 대대로 이빨이 성하지 못하다고도 했다. 고구마와 간장 하나로 겨울 났다는 증언은 흔한 편에 속했다.



지금도 종종 내가 더 힘들게 살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가난하게 큰 게 훈장처럼 쓰이는 경우다. 부자는 부끄러운 것이 공식이랄까. 가난을 이기고 이렇게 훌륭하게 살아남았다는, 인간 승리의 표현이지만 우리나라 부자들이 욕을 먹어 왔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아무튼 나는 예전의 굶주림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 시절은 생선이 흔했다. 고둥을 미끼로 마을 앞에서 30㎝ 감성돔을 여러 마리 낚은 게 아홉 살 때였으니까. 그래서 물었다.



“왜 소나무 껍질을 먹어요? 고기 낚아 먹으면 되잖아요.”



그때 한 어른의 대답.



“끼니마다 그것을 어떻게 먹냐. 사람은 모름지기 곡기가 들어가야 살지.”



아, 곡기(穀氣). 결국은 그거였다.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우리 섬 학교에서는 주기적으로 배급이 나왔다. 우유와 건빵. 우리들은 어쩌다 나오는 우유 배급을 더 좋아했다. 그것이 나오면 다들 가루를 핥고 다녀서 입가에 하얀 침 자국이 가실 날이 없었다. 우유 가루는 물에 갠 다음 구워 딱딱한 과자로 만들 수도 있었다.



건빵 배급 날이면 마대자루를 하나씩 들고 등교했다. 결석하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하교시간에 선생님이 다섯 바가지씩 퍼주면 아이들은 상장이라도 받은 것처럼 의기양양 자루를 메고 고개 넘어 집으로 갔다. 건빵은 어른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밭일 가는 사람들이 점심으로, 물일 가는 해녀들이 간식으로 그것을 가져갔다.



“야들아, 언제 건빵 배급 나온다고 안 하던?”



골목에서 만나면 꼭꼭 물어보던 동네 할머니도 있었다. 어른들이 이 심심한 건빵을 왜 좋아하는지 잘 몰랐는데 그것은 곡기였기 때문이었다.



겨울이 깊어지면 집마다 곡식이 바닥을 드러냈다. 보리가 패려면 한참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그때 톳을 뜯어다가 밥을 해 먹었다. 구황 식품으로 으뜸이었다.



톳밥은 톳 줄기로 만든다. 톳이 자라나면 제법 크다. 그것을 데쳐 말리면 잎이 떨어지고 줄기만 남는다. 줄기를 잘게 잘라 쌀이나 보리를 넣고 만든다. 약간의 쌀이나 보리로도 몇 사람 분량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섬 음식은 탕이 발달했다. 곡식을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귀보시탕이라는 게 있다. 귀보시는 목이버섯이다. 귀처럼 생긴, 짬뽕에 한두 개 들어 있는 얇은 버섯이 그것이다. 그것을 말렸다가 물에 불린 다음 전분가루를 풀어 만든다.



홍합·문어·비말·미역·거북손, 하여간 그때그때 나는 것이 모두 탕의 재료가 된다. 전분이 들어가 걸쭉하게 변하면서 부피가 늘기에 식사 대용으로 쓰였다. 지금도 제사나 차례상에 꼭 올라가고 별미로, 버릇으로 해 먹는다.



톳밥은 이제 해 먹지 않지만 톳나물은 지금도 집마다 상에 오른다. 톳나물은 자라기 전 여린 것으로 만든다. 된장이 주요 양념이며 젓국장 조금, 고추장과 식초, 설탕은 기호에 따라 넣는다. 요즘은 매실을 넣기도 한다. 씹히는 질감이 좋고 손암 선생의 설명대로 맛이 상큼하다. 톳나물에 밥을 비벼 먹으면 시원한 바다 기운이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



자라버린 톳은 삶고 말린 다음 자루에 넣고 바람 잘 통하는 곳에서 숙성시킨다. 다시 삶아 물에 여러 날 담가 두면 퉁퉁 불어나는데 그것을 가지고 무쳐 먹는다.



사슴꼬리와 비슷해 녹미채라고도 부르는 톳은 오래 먹으면 이빨과 머리카락이 아주 좋아진다. 산모가 먹으면 아이의 뼈가 튼튼해진다. 산성화된 몸을 알칼리성으로 바꿔주기도 하는데 예전에는 살아남기 위해 먹었던 것을 요즘은 건강식으로 먹으니 세월 참 많이 갔다.



전반적으로 부유해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부유해졌다는 것을 못 느끼는 모양이다. 이유 없이 불안하고 공연히 안달 내고 가만히 있으면 손해 본다고 생각한다.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는 게 증거다. 스스로 웃을 능력이 사라져버려 개그와 예능 프로에 눈 박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소설가 한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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