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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분단현장을 가다] 전쟁 60년, 전후세대의 155마일 기행 ③ 철원 ‘철의 삼각지

평상시 교통의 요지는 전시엔 전략의 요충지가 된다. 전선도 결국 길을 따라 번지기 때문이다. 경원선이 지나고 금강산 전기철도가 시작되는 철원이 그랬다. 격전을 치른 백마고지(395m)도 분단의 상징으로 철원평야에 솟아 있다. 지난달 15일 GOP의 벙커에서 바라본 DMZ는 이곳에서 전사한 수만 명의 고통과 절규를 잊은 채 잠자고 있는 듯 고요했다. [철원=김태성 기자]


강원도 철원군 관지리 노동당사가 탄흔을 안고 폐허로 서 있다. 노동당사는 철원 땅이 해방과 분단을 거치며 어떤 유전을 겪었는지 한눈에 보여준다. 38선 이북 지역인 철원·평강·김화·포천 일대는 인공 치하 5년 동안 이 노동당사의 관할 아래 있었다. 노동당사는 과거 인구 3만의 번화한 철원 시가지, 즉 구철원의 남쪽 관문이었다. 이제 민간인 출입통제소가 그 앞에 서 있다.

열흘 새 24회 뺏기고 뺏은 백마고지
역전의 팔순 노병에겐 아직 전투 중



북한이 1946년에 지어 한국전쟁 전까지 사용한 노동당사 건물. [철원=김태성 기자]
대학생 때 김주영의 단편 ‘쇠둘레를 찾아서’를 읽고 철원을 찾았다. 쇠둘레는 구철원의 옛 이름으로 소설 속 인물들은 전쟁 전 기억을 갖고 철원을 찾아 헤매다가 종내에는 신철원과 구철원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구철원 일대는 전쟁 후 오랫동안 민간인들이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금단의 땅이었다. 1988년 안보관광지로 민간에게 개방되자 이곳을 고향으로 둔 실향민들이 많이 찾았고, 그들은 소설의 주인공처럼 기억의 미로에 빠져버렸다. 옛 시가지는 흔적이 없었다. 금융조합, 농산물검사소, 얼음창고와 제사(製絲)공장의 잔해가 드문드문 풀숲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역무원 80명이 근무한 경원선 철원역사도 터만 남아 있었다. 나 역시도 물어 물어 찾으면 쇠락한 읍 거리쯤은 만나리라 생각했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옛 철원은 실향민의 기억 속에나 존재할까 신기루처럼 사라진 땅이었다.



백마고지참전전우회 박명호 회장. [철원=김태성 기자]
철원 가는 길에 동행한 백마고지참전전우회 박명호(80) 회장은 마지막 시가지 모습을 군인의 눈으로 목도했다.



“기와집 천지였는데 전쟁 중에 기둥을 빼다 땔감으로 썼지. 연료 보급이 원활하지 않았으니까. 그도 없어지니 철도 전신주와 침목을 걷어다가 땠어. 철원은 그렇게 사라진 거야.”



그러고 보면 성북동에 자리한 이태준의 고택 ‘수연산방(壽硯山房)’이 철원 기와집의 원형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건축물인지 모르겠다. 수연산방은 이태준이 1930년대 초 철원 고향집을 뜯어다가 복원한 기와집이다. 전란 전에 옮기지 않았다면 그 집마저도 사라지고 없었을 것이다.



겨울을 건너온 철원평야가 봄비에 깨어나고 있다. 철원평야는 대부분 DMZ와 민통선 이북에 들어 있다. DMZ 10㎞ 이내의 통제보호구역 토지가 새만금의 1.2배에 달한다. 민통선을 아침저녁으로 들며 농사짓는 영농인들이 7000명에 이른다. 이제 곧 농민들이 들어 토지를 경작할 것이다. 빈 들에는 한창 북상 채비에 바쁜 재두루미와 쇠기러기들만이 인기척에도 아랑곳없이 한가로이 거닐고 있다. 두루미는 서너 마리씩 가족 단위로 찬 하늘을 날아오는 철새다. 철원평야가 생명의 땅, 평화의 땅이라는 걸 알리는 영물 같다.



비가 멎고 황사가 씻긴 평화전망대에서 북을 바라본다. 멀리 평강고원이 몽골의 초원처럼 펼쳐진다. 마식령산맥도 지평선 너머로 흐릿하게 밀려나 있다. 문득 몇 겹의 시간 속에 놓인 듯 마음이 맥맥해진다. 궁예의 도성 터는 DMZ 풀숲에 숨어 가물가물하고, 북방에서 불어오는 칼바람만이 요요하다. 궁예와 그 군사들이 거침없이 군마를 몰았을 것이다. 중부 준령들 틈에 너른 들을 가진 세 고을 철원·김화·평강을 일러 ‘철의 삼각지’라 했다. 철원·김화는 사라지고, 평강은 낙타고지 뒤에 숨은 이북 땅이 되었다. 이 드넓은 평야를 남북 어느 쪽도 내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백마고지 전적기념관 앞에 세워진 위령비. [철원=김태성 기자]
서편 DMZ에 자리 잡은 백마고지. 이 유명한 고지가 고작 해발 395m다. 이를 두고 중공군 4만5000과 국군 2만이 열흘간 스물네 번이나 주인을 바꿔가며 격전을 치렀다. 피아간 27만여 발의 포탄을 쏟아붓고 백병전이 치열했다. 전투가 끝났을 때 국군 3500여 명, 중공군 1만여 명이 죽거나 부상했다. 세계 전사에서도 유례 없는 격전. 백마고지 전투는 한국전의 유구한 상징이 되었다. 전쟁에 대해서는 한 치의 치욕도 용납할 것 같지 않은 박명호 회장도 “한마디로 끔찍한 전쟁이었다”고 어깨를 떤다.



“고지를 탈환하고 보고를 한단 말이야. ‘정원 178, 사망 80, 후송 71, 현재원 27!’ 신병으로 보충 병력을 채우는데 처음에는 무슨 짐승들처럼 얼이 빠져서 몰려다녀. 하루 투입되고 전사한 병사가 수두룩했지. 그러나 전투가 거듭되면 악이 생겨. 그것을 뭐라 해야 할까. 죽어도 괜찮다는 이상한 심리상태에 빠져서 싸웠지.”



그는 백마고지를 가리키며 무의식적으로 너덧 번이나 흙이 붉은 능선이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저 회색빛 낮은 능선일 뿐이었다. 붉은 능선 또한 미로에 빠진 기억일 테다. 이런 가혹한 전투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상징이 된 전사(戰史)는 드높으나 간결하다. 기록은 이 비참한 전투의 실상을 다 말해주지 않는다. 눈앞에서 전우들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어떻게 매일 전선에 다시 설 수 있었을까.



백마고지에서 살아남은 전우들이 이제 500명 남짓 생존해 있다. 노병들은 백마고지가 건너다 보이는 대마리 언덕에 위령비를 세우고 매년 서너 번씩 찾는다. 생존과 승리를 자축하기 위한 발걸음이 아니다. 곁에서 죽어간 전우들뿐 아니라 중공군까지 애도하기 위해서다. 그런 회원들이 매년 이삼십 명씩 유명을 달리하고 있다. 이제 삼사 년이면 노병들의 증언도 접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3월 15일 저녁, 박명호 회장은 철원 동송읍에 사는 옛 전우를 저녁자리에 불러냈다. 정해영(81세) 할아버지. 3급 상이군인이다. 그에게도 전쟁의 기억이 끔찍하기는 마찬가지다. 자신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손부터 내저었다. 그런 그가 술기운을 빌려 비로소 깊은 기억을 길어낸다. 부여가 고향인 그는 아내와 딸을 두고 참전했다. 9사단 30연대 기관총 사수로 백마고지 탈환 후 저격능선 전투에서 포탄 파편에 중상을 입고 18개월 만에 전역했다. 고향에 돌아가 누워서도 60년을 전장의 악몽으로 뒤숭숭했다. 그러나 인생은 아이러니하다. 살다 보니 전장 부근으로 돌아와 노년을 보내고 있다. 전쟁 후 얻은 아들과 함께 목장을 일구러 왔다가 철원에 터를 잡았다.



“전장에서 하루 넘어가는 게 십 년 같았지. 우리한테는 제대라는 게 없었어. 여기서는 죽거나 부상당해 나가는 길밖에 없었지. 뒤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심도 사라져. 그런데 그런 끔찍한 전쟁이라도 인생은 못 당해. 저 땅처럼 말이야. 지금 내가 여기 이렇게 살아가잖나.”



그리고 정 할아버지는 평생 달고 살던 전쟁의 악몽을 근래에 꾸지 않는다고 했다. 이것이 박(朴)의 전쟁이고, 정(鄭)의 전쟁이다. 저녁이 내린 길로 노인이 등을 보이고 사라졌다. 철새들이 하룻밤 묵을 둥지를 찾아 부산하다.



전성태·소설가



◆소설가 전성태=1969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다. 1994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해 지금까지 세 권의 소설집(『매향』 『국경을 넘는 일』 『늑대』)과 장편소설 한 권(『여자 이발사』)을 냈다. 작품 수가 많지 않지만 참신한 소재, 진정성 어린 글쓰기가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라져가는 농촌 공동체의 실상을 다룬 『매향』은 김유정·이문구식 해학의 계보를 잇는다는 평가다. 『여자 이발사』는 일제 시대 조선 남자와 결혼해 해방 직후 서울 청계천변에 정착한 한 일본인 여성 이발사의 인생 유전을 다룬 소설이다. 지난해 나온 소설집 『늑대』는 주로 몽골 여행 경험을 다룬 것이다. 이 소설집으로 채만식문학상·이무영문학상 등을 받았다.




관광객·전쟁물자 날랐던 금강산열차



철원·김화·평강 ‘철의 삼각지’ 통과

전쟁 통에 뜯겨나간 철길 흔적만




백마고지는 ‘철의 삼각지’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철의 삼각지(Iron Triangle Zone)는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밴 플리트 장군이 작전 수행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만든 용어다. 철원·평강·김화 등 3개 군(郡)을 아우르는 삼각형 지역의 지형이 북으로 갈수록 해발이 높아져 미군과 한국군이 공격은 물론 방어에도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삼각지 안의 철원평야는 김일성이 애지중지했던 곡창지대이면서 전차가 기동할 수 있는 핵심 길목이었다. 그 때문에 이를 차지하기 위해 김일성 고지, 오성산, 아이스크림 고지 등 일대의 크고 작은 봉우리를 두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백마고지 전투도 그런 격전지 중 하나였다.



교통 요지이다 보니 철의 삼각지에는 자연스럽게 철로가 놓였다. 경성과 원산을 연결했던 경원선, 철원에서 갈라져 금강산으로 이어졌던 금강산전기철도가 모두 이 지역을 통과했다. 금강산전기철도는 흔적만 남아 있다. 일제 말기와 한국전쟁 막바지 철 공급이 달리자 필요에 따라 철로를 뜯어다 썼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 있는 흔적은 한탄강을 가로지르는 철원군 정연리 철교 정도다.



민통선 안에 있는 철원군 양지리 양지마을에서는 철도를 이용했던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평생을 산 김옥순(69) 할머니는 “어렸을 때 금강산전기철도를 타고 철원읍에 영화 보러 간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철도는 일본 회사인 철춘(鐵春)철도주식회사가 1921∼26년 철원에서 창도까지 60여㎞ 구간을 1차로 완공했다. 창도는 지금은 북한 땅이다. 이곳에 풍부한 유화철을 철원까지 실어 나른 후 경원선을 이용해 흥남제련소로 수송하려는 목적이었다. 철도는 1926∼31년 창도~내금강 구간 50㎞가 추가되면서 금강산 관광열차로 인기를 끌었다. 철원에서 내금강까지 116.6㎞를 네 시간에 달렸다. 요금은 쌀 한 가마 값인 7원56전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철원역사문화연구소 김영규 소장은 “한국전 직전 북한군이 전기철도로 화포·탱크를 실어 날랐다고 증언하는 분들도 있다”고 말했다. 철도는 한국전쟁의 목격자인 셈이다. 철원에서 시작하는 28개 역 중 여덟 번째인 유곡역이 남한 최북단역, 다음 금곡역부터는 DMZ이거나 북한 땅에 포함돼 있다.



특별취재팀 취재 신준봉 기자, 사진 김태성 기자, 동영상 이병구 기자



취재 협조 국방부·육군본부, 국군 5사단·6사단·15사단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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