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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혁 때 학교 못 다닌 한 유학 가서 풀어”

미국 국립보건원(NIH: 의료·건강 정책을 담당하는 미국 행정기관) 국제업무실장인 류위안(劉嫄·56·사진) 박사가 한국을 찾았다. 연세대·KAIST 등의 연구센터를 돌아보고 연구원들과 세미나를 하기 위해서다. 중국계 미국인인 류 박사는 신경과학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통한다. 발표한 논문이 세계 주요 대학 교과서에 실질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1954년 중국 톈진(天津)의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문혁) 등 중국 현대사의 풍상을 온몸으로 겪으면서도 학문에 정진해 국제적으로 성공한 인물로 유명하다. 1일 서울에서 그를 만나 고난과 극복의 사연을 들어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미국 국립보건원 국제업무실장인 중국계 류위안

-집안 내력이 궁금하다.



“나는 태어날 때 성이 루(盧)씨였다. 할아버지·외할아버지 모두 민국(民國·장개석 정부)시절 활약한 교육자였다. 할아버지 루무자이(盧木齋·1856~1948)는 허베이(河北)성 교육청장을 지냈다. 텐진 난카이(南開)대학에 자신의 이름을 딴 ‘무자이(木齋)도서관’을 세웠다. 외할아버지 류다바이(劉大白·1880~1932)은 루신(魯迅)·후스(胡適) 등과 함께 ‘백화(白話·구어체)운동’을 주도한 시인이다. 푸단(復旦)대 교수를 거쳐 난징(南京)국민당 정부의 교육부 부부장을 지냈다. 부모님도 모두 대학을 졸업한 지식인이었다. 49년 공산당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비교적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57년 ‘자본주의 사상 척결(反右)운동’이 시작되면서 아버지가 자본주의 우파로 몰려 끌려가 재판도 없이 7년 동안이나 감옥에 갇혔다. 시련이 시작됐다.”



-성은 언제 바뀌었나.



“66년 문혁이 터져 더 큰 시련이 찾아오면서다. 홍위병이 집으로 몰려 들었다. 우리 집에는 희귀본을 비롯한 외국책이 많았다. 어머니는 베이징대학에서 서양어를 전공했고, 아버지는 미국 유학을 다녀왔기 때문이다. 홍위병들은 외국 책을 보자 ‘자본주의 독’이라며 마당에 던졌다. 그리고는 모조리 불태웠다. 나는 하루 종일 책 타는 냄새를 맡아야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지금도 종이 타는 냄새가 나면 몸서리를 친다. 문혁 주민위원회는 내 부모를 강제로 이혼시켰다. 그리고는 내 성을 어머니 성인 류(劉)씨로 바꾸었다.” (그는 부모의 이름은 공개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끝내 재결합하지 못했다고 한다.)



-고생이 심했겠다.



“그 뒤 집 지하실에 거의 감금된 상태로 살아야 했다. 가구는 모두 뺏겼고, 돈도 없었다. 남아있던 책을 팔아 겨우 연명했다. 학교에 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시골로 쫓겨가기도 했다. 그렇게 10년을 견뎌야 했다.”



-공부는 언제 했나.



“16살 때부터 공장에 나가 기계 다루는 일을 했다. 어머니는 어려움 속에서도 자식 교육에 열의를 보였다. 어디선가 책을 빌려다가 밤새 베껴 주시곤 했다. 나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76년 마오쩌둥이 죽고 개혁개방이 시작됐다. 78년 대학이 다시 문을 열었다. 그해 가을 대입시험을 치러 베이징대에 합격했다. 생물학과에 배치됐다. 하방(下放·지방으로 쫓겨감)됐던 교수들이 돌아온 다음날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교육환경이 열악했지만 우리는 밤을 세워 공부했다. 공부가 행복이었다. 책이 다 떨어질 때까지 돌려보고, 토론했다.”



-어떻게 중국을 떠났나.



“베이징대에 교환교수로 와 있던 신경과학 분야 석학인 존 니콜스 박사를 만났다. 스위스인이었던 그는 나를 높게 평가하고 스위스 유학을 주선했다. 베이징대에서 석사 과정을 마친 뒤 스위스 바젤대로 유학을 갔다. 니콜스 박사의 지도를 받으며 신경과학 공부를 계속했다. 89년 박사학위를 받은 뒤 귀국하려 했다. 그러나 베이징에서 그 해 6월 천안문 사태가 터지면서 귀국을 포기했다. 중국의 정치 상황이 또다시 내 인생을 바꾼 것이다.”



-NIH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는가?



“미국의 신경과학 분야 연구지원프로그램인 ‘그래스(GRASS)재단’의 장학금을 받게 되어 도미했다. 한 해 10여 명에게만 주는 장학금이다. 연구 실적을 인정받아 뉴욕주립대에서 포스트닥(박사후)과정을 밟았다. 당시 NIH와 함께 일을 하게 됐고, 95년 프로젝트 책임자가 됐다. NIH의 자금 지원대상 프로젝트를 심사하고, 선정하는 일이다. 고도의 학문적 지식이 필요한 분야다. 중국인으로서는 처음이었다. 2000년 350건의 연구 계획서를 심사하기도 했다. 프로젝트 한 건 당 평균 지원 규모 약 30만 달러, 한 해 약 1억500 달러가 내 결정에 따라 지원됐다. 국제관련 업무를 주로 맡고 있는 요즘도 한 해 약 80건의 연구 계획서를 심사하고 있다. NIH의 한 해 연구지원 규모는 280억 달러에 이른다.”



-한국의 신경과학 분야 연구 수준은 어떻게 보나.



“연구센터를 돌아보고, 연구원들과 세미나를 해보니 연구수준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일부는 세계 수준에 도달했다고 본다. 세계 과학자들을 그러모아 과학을 육성하려는 과학비즈니스벨트 구상은 대단한 비전이라고 본다.”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는 은하도시포럼(회장 민동필)이라는 민간모임에서 구상한 프로젝트로 세종시에 조성할 예정이다)



-세계 과학계 흐름을 꿰뚫고 있는데, 어느 분야 연구가 유망하다고 보나.



“정보혁명의 시대다. 그러나 지식은 오히려 약해지고 있다. 정보가 지식으로 통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의 힘을 빌어 정보를 조직하고, 해석하는 연구가 유망할 것이다. 인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환경 역시 눈여겨봐야 한다.”



-숱한 역경을 딛고 오늘에 이르렀다. 중국을 어떻게 생각하나.



“중국에서 문혁 10년간 교육은 단절됐다. 그게 가장 큰 폐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교육은 계속돼야 한다. 요즘도 중국에 자주 가 과학계 인사와 교류한다. 중국 과학발전을 위해 일하고 있다. 나의 모국이니까 말이다.”



한우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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