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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65) 달라진 적의 공세

6·25전쟁 전사자 유해 발굴의 첫 삽을 뜬 지 올해 4월 3일로 10년이 됐다. 그럼에도 이땅 곳곳에서는 전몰자 유해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어 전쟁의 격렬함과 고통을 고스란히 알려주고 있다. 사진은 2007년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야산에서 57년 만에 유해가 발굴된 국군 전사자의 철모. 그 앞에 조화가 놓여 있다. [중앙포토]
1950년 9월 들어 우리 1사단의 전면에 이상한 낌새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싸움을 걸어오는 적의 전법(戰法)이 달라지고 있었다. 다부동 전면을 뚫지 못한 적들은 초조감에 휩싸였던 모양이다. 대구로 밀고 내려가려는 김일성의 독촉은 여름 소나기처럼 북한 전선 지휘부를 때렸을 것이다.

적들은 서쪽으로는 창녕과 영산의 낙동강 돌출부에서 다부동~영천~포항을 잇는 모든 전선에 고루 병력을 배치했다. 긴 전선을 밀어보다가 허점이 드러나는 지역을 집중적으로 때리자는 의도였다. 두 군데의 전황(戰況)이 9월 들어서 갑자기 급해지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다부동에서 포항을 잇는 선의 중간에 해당하는 영천이었다.

영천은 신녕과 구산동·입암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교차점이다. 아울러 대구와 경주 방향으로 도로망이 횡적으로 이어져 있기도 한 지역이다. 교통의 요지인 이곳이 뚫리면 대구와 경주가 바로 위험에 빠진다. 경주 방면으로도 적의 1개 사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영천을 점령한 뒤 경주로 진출한 병력을 한데 모아 부산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 작전이 의도대로 맞아떨어진다면 국군의 방어 핵심인 1군단과 2군단이 동서로 나뉜다. 횡적인 아군의 보급로가 끊어지면 우리가 지키고 있는 부산교두보의 모든 방어선이 무너질 위험에 빠진다. 북한군은 다부동에서 국군 1사단을 압박하던 15사단을 빼돌려 영천 지역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2군단장 유재흥 장군이 9월 5일 나를 불렀다. 하양국민학교(초등학교)에 있는 군단 CP에 갔다. 유재흥 군단장은 이런 상황을 설명하면서 6사단 김종오 장군과 나에게 “각 1개 연대를 차출해 영천에 보내라”고 했다. 영천의 상황이 급했던 것이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1사단은 11연대를 보내기로 했다. 6사단도 1개 연대를 파견하기로 했다.

적의 공세는 5일 밤부터 강해졌다. 북한은 영천 점령이 지연되는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15사단장 박성철을 경질하면서 영천 돌파를 재촉했다. 5일 밤에는 영천 읍내로 적의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동이 틀 무렵에는 적의 전차가 읍내에 들어섰다.

그러나 우리 측 8사단은 잘 싸웠다. 신속하게 방어진지를 영천 남쪽에 구축한 뒤 강력한 반격 태세를 갖췄다. 6일 오후에는 1사단 11연대가 영천 남쪽에 도착해 응전 태세에 들어갔고, 6사단의 19연대도 도착했다. 오전에는 미 8군에서 지원한 탱크 1개 소대(5대)도 이미 현지에 도착해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적은 영천을 점령한 뒤 기세가 올랐다. 그러나 6일의 날씨가 흐려서 미군의 공중폭격이 없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북한군의 시야에 유엔의 폭격기와 전폭기 혼성편대가 들어왔다. 그리고 맹폭이 이어졌다. 아군의 야포도 불을 뿜었다. 대포의 지원 사격으로 적군의 기세는 많이 줄어들었다. 영천을 사수하려는 국군 수뇌부의 치밀한 전략이 빈틈없는 화망(火網)의 구성과 병력 배치로 이어져 적의 선봉을 꺾는 데 크게 기여했다.

육군본부의 기민한 지휘 조치는 계속 이어졌다. 8~9일에는 적이 앞으로 영천을 돌파하지 못하도록 국군 자체의 방어선이 형성됐다. 적은 그 뒤로 대규모 공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야간에 중대 규모의 병력을 침투시켜 아군의 전초(前哨) 진지를 공격하는 수준의 공세만 폈을 뿐이다.

확실히 적의 예기(銳氣)가 꺾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천 지역의 전황을 지켜보다가 나는 이 점이 궁금했다. 적의 공격력은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다부동에 이어 영천을 뚫지 못했다면 적의 전력은 상당히 손상된 상태일 것이다.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

나는 지프를 타고 영천으로 향했다. 국군 8사단을 주축으로 벌인 아군의 반격으로 적군은 영천에서 이미 패퇴했다. 길에는 버려진 적군의 전차가 있었다. 겉이 멀쩡했다. 크게 부서진 곳도 없었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자세히 T-34 전차를 들여다봐도 아무런 이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그때야 적의 전차가 기름을 넣지 못해 버려졌다는 점을 깨달았다.

부관한테도 “북한군들이 며칠 동안 굶주린 상태”라는 보고를 받았다. 길 옆으로 지나가는 북한군 포로의 모습에서 심각한 굶주림에 시달린 흔적이 역력히 드러났다. 북한군의 전력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낙동강까지 이어지는 적의 보급선은 길었다. 미군은 그들 머리 위로 자주 전폭기를 띄워 적의 보급선을 집요하게 흔들었다. 무기와 장비·음식을 포함한 모든 보급물자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고 있었던 셈이다. 더 이상 공격을 감행하기에는 모든 방면에서 힘이 달리는 상태, 군사용어로는 공세종말점(攻勢終末點)에 그들이 와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그리고 나는 그 역력한 흔적들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내 머릿속은 어느덧 반격의 그림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낙동강에서 이제는 일어서는 일만 남은 것이다. 자, 이제 나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가. 전쟁 직후의 임진강 방어, 한 달 남짓의 지연전, 다부동의 사수 작전 등이 스치는 그림처럼 내 머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는 나아가서 적을 물어뜯어야 할 때다. 마음속으로 뜨거운 무엇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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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