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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벨이 쓴 연극 ‘리빙’

연극 ‘리빙’에서 빌렘 전 총리가 젊은 여성과 놀아나다 들켜 허겁지겁 도망가는 장면. [LG아트센터 제공]
이토록 조롱해도 되나, 이렇게까지 희화화해도 되는 걸까.

‘동유럽의 만델라’라 불렸던 바츨라프 하벨(74) 전 체코 대통령이 극본을 쓴 연극 ‘리빙(Leaving)’이 4일까지 사흘간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 무대에 올랐다. 하벨은 ‘벨벳 혁명’을 이끈 체코 민주화의 상징이자, 정치 입문 전까지 촉망 받던 극작가였다. 그가 정계 은퇴 후 다시 연극에 돌아와 화제가 됐다. 게다가 권좌에서 물러난 최고 권력자의 얘기를 다뤘다.

주인공은 전 총리였던 빌렘. 그는 벚꽃 나무에 둘러싸인 관저에 살고 있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불안하다. 현 총리가 빌렘을 관저에서 내쫓기 위해 갖은 책략을 쓰기 때문이다. 겉으론 저항하는 척 하지만 이내 무력감에 빠진다. 조금의 떡고물이라도 생기길 바라며 변절도 마다 않는다. 일상 역시 바지가 질질 흘러내릴 듯한 추레한 모습을 보이더니, 기자와의 인터뷰에선 보좌관이 하는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기 바쁘다.

다른 누구의 작품이라도, 썩 괜찮은 블랙 코미디가 됐을 것 같다. 핵심은 하벨이 직접 썼다는 것. 주인공 빌렘은 언뜻 봐도 하벨을 연상시킨다. “우유부단하며 여성 편력이 있다”란 하벨에 대한 세간의 소문을 확인시켜 주듯 극중에서 빌렘은 귀가 얇아 주변 사람들에게 휘둘리기 일쑤며, 미모의 정치학도에 빠져 어설프게 밀회를 즐기다 들통이 나고 만다.

정치적 풍모만 스스로 깎아 내린 게 아니었다. 작품은 부조리극의 형식을 띤다. 극의 긴장감이 조금이라도 고조되려 할 때엔, 어김없이 작가라는 사람의 목소리가 등장해 흐름을 깨곤 했다. 이 목소리는 하벨이 직접 녹음했다고 한다. “전 매번 잊어버리곤 합니다. 지금 누가 무대에 있고, 누굴 퇴장시켜야 할지. 아무래도 시를 써야 할까 봐요.”

엄청난 함의가 깃든 것처럼 포장되지만, 실상은 자신의 극작이 실수투성이의 산물이라는 걸 자인하는 셈이다.

누구나 약점은 있지만, 치명적인 부분만큼은 숨기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하벨은 그 치부마저도 드러냈다. 왜 그랬을까. ‘민주 투사’ 혹은 ‘뛰어난 극작가’라는 이미지가 부담스러워서? 의도가 무엇이든, 위대한 인물의 은밀한 자기 고백을 엿본다는 건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세상에 별 거 없구나’란 생각이 스쳤다. 스스로를 비하하며 상처 받는 평범한 이들에게 위로의 악수를 건네고자, 하벨은 저 밑바닥까지 자신을 낮춘 게 아니었을까.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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