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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손된 예수의 생명 정신 되살리는 게 무교회의 참뜻

기독교는 2000여 년 역사를 통해 민주주의·자본주의 등 다양한 사상, 시대 정신에 대적하기도 하고 연대하기도 했다.

두레교회 김진홍 목사가 말하는 우치무라 간조

두레교회 김진홍(68·사진)만큼 기독교와 여러 이념 사이에서 고민하며 치열하게 살아온 목회자도 없다.

김 목사는 유신체제 반대로 투옥된 바 있는가 하면 뉴라이트 운동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빈민 선교뿐만 아니라 통일시대 기독교 만들기에도 열심이다. 김진홍 목사는 원효, 정약용에서 브라질 교육학자 파울루 프레이리(1921~97)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의 영향을 받았다. 그중에는 일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도 있다.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두레교회에서 김 목사를 17일에 만나 우치무라 간조의 신앙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에 대해 들었다.

-우치무라 간조와 어떤 인연이 있는지.
“선친이 일제 시대에 도쿄에서 택시 기사로 일할 때 우치무라 선생에게 배웠다. 내가 6살 때 아버지께서 일본에서 돌아가셨지만 아버지와 함께 우치무라 선생에게 배운 어머니께서 자식들에게 선생의 가르침을 전해 주셨다.”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우치무라 간조 선생은 ‘예수 사랑’과 ‘민족 사랑’을 융합했다. 미국에서 유학한 선생은 ‘복음에는 국적이 없지만 크리스천들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인식에 도달했다. 미국 교회는 미국을 사랑하고 일본 교회는 일본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치무라 선생이 발전시킨 기독교를 ‘사무라이 기독교’라고도 한다. 선생은 사무라이 집안 아들로 어릴 때 그 정신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일본을 사랑한 우치무라 선생은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을 신랄히 비판했다. 선생은 일본이 동양 평화에 기여하지 않고 서양 제국주의를 답습하면 하나님께서 일본에 불벼락을 내리실 것이라고 경고했다. 1910년대에 이미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다.

선생은 일본에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조선에 대해 굉장히 안타까워했다. 명문 제일고등중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 ‘불경사건’으로 해고당하고 비(非)국민이라는 낙인이 찍혔으나 종전까지 용기 있게 초지일관했다. 선생의 또 다른 중요한 사상 중 하나는 평민 사상이다. 보통 사람들이 저마다 예수를 믿어 자율적인 인격과 평민 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사상이다. 우치무라 선생은 6평 다다미 방에서 청년들에게 성경 공부를 지도해 그중 도쿄대 총장 3명, 사회당 창당 멤버,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 등 전후 일본 지도자들이 나왔다.”

-신앙이 민족 사랑과 일치하는 원리는.
“예수를 진실하게 믿는 사람은 결국은 자신이 속한 겨레, 나라를 사랑하게 된다. 예수 사랑과 민족 사랑은 동전의 앞뒤와 같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모세에서 바울까지 일관된 성경적 전통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처럼 자기 민족을 너무 내세우면 국수주의가 되고, 배타주의가 된다. 우치무라 선생은 예수를 통해 제국주의 일본을 평화주의 일본으로 바꾸려고 했다.”

-성서를 매우 중시하는 무교회주의가 성서에 예수가 세운 것으로 나와 있는 교회를 ‘무시’하는 것은 모순 아닌가.
“우리나라에서는 무교회주의에 대한 오해가 많아 무교회주의의 좋은 정신이 한국 교회에 보급이 못 되고 있다. 우치무라 선생이 배격하는 교회는 제도화돼 인위적으로 운영되는 교회, 예수의 진리·자유·생명의 정신이 약해진 교회다. 진정한 교회로 돌아가자는 게 무교회주의의 본질이다. 무교회주의 사람들이 말한 장점을 받아들이고 교회가 반성할 것은 반성해야 한다. 무교회주의는 ‘나쁘다’ ‘비기독교적’이라고 규정해버리는 것은 교회 자체에 큰 손실이다.”

-무교회주의는 반(反)선교사적인가.
“반선교사 입장도 아니다. 우치무라 선생은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로 유명한 윌리엄 클라크 같은 선교사의 영향을 받아 크리스천이 됐다. 무교회주의는 반교회가 아니듯 반선교사도 아니다. 선교사를 배격하자는 게 아니라 선교사든 목사든 집사든 진실한 크리스천으로서 역할을 하자는 뜻이다.”

-우치무라 선생이 한국에 준 영향은.
“1920년대 도쿄에서 김교신·함석헌·송두용 등 우리 유학생들이 우치무라 선생에게서 예수 사랑과 민족 사랑, 무교회주의의 정신을 배웠다. 그 영향하에 1927년 5월에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창간했다. ‘성서조선’ 창간호 창간사를 김교신 선생이 썼다. 요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내게는 두 애인이 있다. 성서라는 애인과 조선이란 애인이 있다. 두 애인 중 한 명도 버릴 수가 없어서 두 애인을 합쳐 ‘성서조선’이라고 한다.’ 이처럼 우치무라 선생은 한국의 민족주의적 기독교의 전개에 일조했다.”

-오늘 우리에게 우치무라·김교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우리나라 개신교는 그동안의 업적과 공로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잠시 주춤하며 세인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 우리가 3·1 운동 때나 일제 저항기만 해도 쟁쟁한 민족지도자들이 개신교 신자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 교회가 양적인 팽창을 하고 신앙의 자유를 누리면서 민족 정기를 구현하는 신앙의 정신이 많이 사라졌다. 저력 있는 한국 교회가 진정한 교회 모습을 회복하는 데는 우치무라·김교신 선생 같은 선배들의 삶과 사상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숨 고르기에 들어간 한국 교회가 우리 역사에 뿌리를 내리고 통일 한국 시대를 대비하려면 김교신·우치무라 같은 분들의 정신을 대폭 수용할 필요가 있다.”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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