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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찾은 聖君의 길, 지식경영의 시대를 열다

경복궁 경회루 앞 수정전. 그 앞에 집현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집현전 초석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석재를 감싸고 있던 사진 속 나무는 2년 전까지 서 있었으나 최근 ‘정비’라는 이름으로 베어졌다. 언제까지 ‘정비’라는 명목으로 유적 파괴가 계속되어야 하는지 안타깝기 짝이 없다.
성공한 국왕들 세종② 미래 인재 양성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태종이 효령을 제치고 충녕을 후계자로 지목했던 이유도 독서가라는 데 있었다. 태종은 충녕을 선택하면서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비록 몹시 추운 때나 아주 더운 때라도 밤새 독서하므로 나는 그가 병이 날까 두려워 항상 야간 독서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내 큰 책을 모두 청해 가져갔다(태종실록 18년 6월 3일)”고 말했다. 허봉(許<8451>)이 편찬한 해동야언(海東野言)에는 충녕이 병이 들었을 때도 독서를 멈추지 않자 태종이 내시에게 책을 모두 거두어 오게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병풍 사이에 구소수간(歐蘇手簡) 한 권을 빼놓고 가자 충녕은 송나라 구양수와 소식의 편지 모음집인 이 책을 ‘천백 번이나 읽었다’고 전한다.

국조보감(國朝寶鑑)은 “세종이 잠저(潛邸:즉위 전 사저)에 있을 때는 물론 즉위 후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진선(進膳:식사) 때도 반드시 책을 좌우에 펼쳐 놓았다”고 말한다. 세종 자신도 근신(近臣)들에게 “내가 궁중에 있으면서 손에 책 없이(<6B5B>手) 한가롭게 앉아 있을 때가 없었다”고 말했다. 집현전 출신의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필원잡기(筆苑雜記)에 따르면 세종은 ‘독서는 유익하지만 글씨를 쓰거나 글을 짓는 것은 임금으로서 유의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군주는 책 속의 지식을 정사에 응용하면 되지 서예나 작문 같은 일에 시간을 뺏길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세종은 독서는 남는 시간에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종의 「신도비 지문(誌文)」은 세종이 사고(四鼓:오전 2~4시)에 일어나 평명(平明:해 돋는 무렵)에 조회를 받는 등 숨쉴 틈 없이 정사에 매진하다가 내전(內殿:왕비의 거처)에 들어가서도 서적을 보아 조금도 나태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세종은 신하들과 각종 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일종의 콜로키움(Colloquium)인 경연(經筵)을 중시했다. 세종실록은 “(임금은) 성품이 독서를 좋아해서 매일 편전(便殿)에서 정사를 보고 나서 경연을 여는데 상왕의 유연(遊宴:나들이나 잔치)을 받드는 일 외에는 잠시도 폐한 일이 없다(세종실록 1년 3월 27일)”고 전하고 있다.

독서당계회도(讀書堂契會圖). 임금의 명을 받아 집에서 독서하던 문신들의 계회(契會)를 그린 것으로 선조 3년(1570) 때의 것이다. 참석자 9인 중에는 이이·유성룡·정철·윤근수 등이 있는데 이들은 후기 조선을 이끌던 인물이다. 사진가 권태균
세종은 어떤 종류의 책들을 선호했을까. 서거정은 필원잡기에서 세종이 좌전(左傳)초사(楚辭)는 백 번도 더 읽었다고 말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준말인 좌전은 공자가 저술한 역사서 춘추(春秋)의 주석서이고, 전한(前漢)의 유향(劉向)이 편찬한 초사는 굴원(屈原)과 송옥(宋玉) 같은 초나라 사람들의 글을 모은 책이다. 세종이 즉위년(1418) 10월 7일 첫 경연에서 강론한 책은 대학연의(大學衍義)였다. 대학연의는 송나라 진덕수(眞德秀)의 대학 주석서인데, 첫머리가 ‘제왕의 다스리는 순서(帝王爲治之序)’인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제왕학에 관한 책이었다.

그런데 세종이 대학연의를 강론할 때 시종 관심을 나타낸 분야는 역사 문제였다. 대학연의에 당나라 문종(文宗) 때 환관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한 이훈(李訓)의 사례가 나오자 세종은 “만약 일이 성공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라고 물었다. 세종은 5개월 반 만에 대학연의 강독을 끝낸 뒤에도 “읽기를 끝냈으나 다시 읽고 싶다”고 말했다. 태종실록 13년(1413) 10월조는 세자 양녕이 대학연의를 6년 만에 끝냈다고 전한다. 세종은 역사서에 가장 관심이 많아 경연 과목에 대거 포함시키려 했다.

그러나 유학자들은 사서(史書)보다 경서(經書:유학서)를 선호했다. 세종이 “내가 집현전 선비(儒士)들에게 여러 역사서를 나누어 주어 읽게 하려 한다”고 말하자 예문 제학(藝文提學) 윤회(尹淮)는 “안 됩니다. 무릇 경학(經學)이 먼저이고 사학이 그 다음이므로 오로지 사학만 닦게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반대했다. 그러자 세종은 불만을 토로했다.

“내가 경연에서 좌전(左傳) 사기(史記) 한서(漢書) 강목(綱目) 송감(宋鑑)에 실린 고사(古事)를 물으니 모두 알지 못했다. … 지금 유학자(儒者)들이 경학을 닦았다고 하지만 그 이치를 궁구(窮究)하고 마음을 바르게 가진 선비(正心之士)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세종실록 7년 11월 29일)”

세종이 경연 초부터 강론하고 싶었던 역사서는 자치통감(資治通鑑)이었다. 자치통감은 북송(北宋)의 사마광(司馬光)이 주(周)나라부터 후주(後周)까지 16개국의 역사를 294권으로 편찬한 방대한 역사서다. 세종이 즉위년 11월 “자치통감을 강론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라고 묻자 류관(柳觀)은 “자치통감은 책의 권수가 너무 많으므로 모두 볼 수 없을까 우려됩니다”라고 반대했다. 자치통감을 선택할 경우 경연이 역사 전문 강좌처럼 운영되지 않을까 우려한 것이었다.

김익(金益)은 자치통감 대신 근사록(近思錄) 강독을 청했다. 유신들은 경서(經書)나 남송의 주희(朱熹:주자) 등이 편찬한 근사록 같은 유학서를 선호한 반면 세종은 역사서를 선호한 것이다. 세종은 재위 2년(1420) 윤1월부터 통감강목(通鑑綱目)을 강독하는 것으로 유신들과 절충했다. 통감강목은 주희와 그 문인 조사연(趙師淵) 등이자치통감을 주자학의 견지에서 재편집한 59권의 요약본이다. 그러나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에게 자치통감에 주석을 단 통감훈의(通鑑訓義(일명 사정전훈의(思政殿訓義)를 편찬하게 할 정도로 자치통감에 매료되었다. 해동야언자치통감 주석본의 모든 구절을 세종이 손봤다고 전할 정도로 세종은 역사에 정통했다.

세종이 재위 23년(1441) 정인지 등에게 “무릇 정치를 하려면 반드시 전대(前代)의 치란(治亂)의 자취를 보아야 하고, 그 자취를 보려면 오직 사적(史籍)을 상고해야 할 것이다”라면서 책 편찬을 명한 역사서 치평요람(治平要覽)은 제목 자체가 세종이 지은 것이다. 치평요람에는 중국의 주(周)나라부터 원(元)나라까지의 역사를 수록했는데 세종은 “동방(東方:우리나라)의 건국도 오래되었으니 흥폐존망(興廢存亡)을 알아야 한다”며 우리 역사도 수록하게 했다.

역사서를 통해 세종은 미래의 지식 인재 양성이 국가 중흥의 요체라는 사실을 체득했다. 그래서 세종은 상왕 생존 시인 재위 2년(1420) 집현전(集賢殿)을 실질 부서로 만들었다. 집현전은 고려 때부터 존속했으나 태종실록 17년(1417) 1월조에 “집현전은 그 이름만 있을 뿐 실상이 없다”는 기록처럼 명목상의 부서로서 관직도 모두 겸직이었다.

세종은 재위 1년(1419) 2월 좌의정 박은(朴誾)이 “문신을 선발해 집현전에 모아 문풍(文風)을 진작시키자”고 건의하자 가납(嘉納)했으나 구체적인 후속 조치가 나오지 않았다. 이에 세종은 그해 12월 “일찍이 집현전을 설치하자는 의견이 있었는데 왜 다시 아뢰지 않는가”라며 “선비(儒士) 10여 인을 가려 뽑아 매일 모여서 강론하게 하라”고 명했다. 그래서 세종 2년(1420) 3월 문신 가운데 재주와 행실이 있는 연소자(年少者)를 택해 오직 경전과 역사를 강론하고 임금의 자문에 대비하는 집현전 학사들을 탄생시켰다. 연소자를 뽑은 것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대비한 포석임을 주지시켜 태종의 의구심을 불식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세종이 친정 후 집현전 학사들을 대상으로 집에서 독서에 전념하게 한 사가독서(賜家讀書) 제도는 독서를 여가가 아니라 업무의 연장으로 보았던 세종의 시각을 잘 말해준다. 세종은 재위 8년(1426) 12월 집현전 부교리(副校理) 권채(權綵), 저작랑(著作郞) 신석견(辛石堅) 등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희들을 집현관원으로 제수한 것은 연소하여 장래가 있으므로 오직 독서를 시켜 실효가 있게 하려는 것이었으나 각자 직무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독서에 전념할 겨를이 없었다. 지금부터는 집현전에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오직 독서에 전념해 성과를 나타내 내 뜻에 부응하라. 독서 규범에 대해서는 변계량의 지휘를 받으라.(세종실록 8년 12월 11일)”

변계량의 지휘를 받게 한 것은 사가독서가 ‘봉급 받고 놀아라’는 뜻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뿐만 아니었다. 집에서 독서하게 되면 각종 집안일에 부대낄 것을 우려해 재위 24년(1442)에는 신숙주·성삼문 등 6인을 진관사(津寬寺)에 들어가 독서하게 했는데, 이것이 상사독서(上寺讀書:산사에 올라가 독서하는 것)다. 학사들의 독서 장소가 독서당(讀書堂)이었다. 세종의 독서경영, 독서를 업무의 연장으로 본 세종의 지식경영은 그가 성공한 군주가 된 요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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