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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똘 뭉친 8000명 기부자 “좋은 작품 무료로 보게 하자”

1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로커비 비너스 The Toilet of Venus(The Rokeby Venus)’. National Gallery, London
2005년 겨울, 우연히 내셔널 갤러리에서 ‘라파엘을 구하자(Save the Raphael)’라는 캠페인 포스터를 보았다. 오래 전 죽은 작가를 구하자는 구호가 새롭기도 하고 내용이 궁금해서 알아보니 ‘아트 펀드’가 진행하는 캠페인이었다. 당시 개인 소장가에게 빌려 내셔널 갤러리에서 전시되던 라파엘로의 대표작 중 하나인 ‘순결의 마돈나(Madonna of the Pinks)’가 대여기간이 끝나면서 크리스티 경매에 나오게 됐고, 아트 펀드는 이 작품을 구입해 내셔널 갤러리에서 계속 볼 수 있도록 하자고 호소한 것.

사실 이 이슈는 당시 더 타임스와 이브닝 스탠더드라는 양대 신문사가 서로 다른 견해로 열띤 논쟁을 벌였던 국가적 문화재 토론이었다. 논지의 내용은 이미 내셔널 갤러리에 라파엘로의 주요한 작품이 9개나 있는 상황에서 2200만 파운드(약 4400억원)짜리 작품을 하나 더 구입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느냐라는 것에 대한 이견이었다.

2 라파엘로의 ‘순결의 마돈나(Madonna of the Pinks)’.National Gallery, London
이 작품을 하나 소장한다고 내셔널 갤러리의 국가 컬렉션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겠는가 하면서 반대하는 목소리와 이렇게 귀한 작품이 영국에 들어왔고 이미 국민들에게 지금까지 소개되고 있었는데 이제 개인 소장가에게 팔려가도록 할 수 없다는 논리가 뜨겁게 맞부딪혔다.

물론 금액이 크기도 했지만, 작품 하나의 구매를 놓고 약 한 달 동안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의견을 개진하는 공개 문화토론은 정말 신선했다. 결국 이 작품은 아트 펀드의 노력과 개별적인 기부 및 여러 기관들의 노력을 통해 내셔널 갤러리에 남게 됐다.
모든 국민들이 아트를 즐기고 감상하기 위해 설립된 아트 펀드는 민간인들의 노력으로 시작됐다. 1903년 발족한 이래 멤버는 현재 8000명에 이르며, 지금까지 86만 점의 작품을 구입했다.

왜 이런 아트 펀드가 필요했을까. 당장 일반 경매에 가봐도 알 수 있듯, 미술품 가격이 많이 올라 국가가 역사적 목적이나 교육적 목적, 문화적 차원에서 컬렉션을 위한 작품을 구입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졌다. 아트 펀드의 경우 매년 평균적으로 400만 파운드(약 80억원)의 작품 구입비를 여러 미술관과 박물관에 지원하고 있다. 앞서 말한 라파엘로의 ‘순결의 마돈나’를 비롯해 벨라스케스의 ‘로커비의 비너스’, 카노바의 ‘삼위 그레이스(Three Grace)’ 등이 대표적이다.

아트 펀드가 구입하는 것은 미술품뿐만이 아니다. 여러 문화재들, 즉 중국 도자기, 이집트 유물, 이슬람 서예, 현대 미술 등 다양하다. 1903년부터 지금까지 그 액수는 5173만5279파운드 정도지만, 이 금액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1억 파운드(약 2000억원)에 이른다.

또 아트 펀드의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여러 기부자들로 하여금 현금만이 아닌 다른 기부를 받는 시스템을 만들어 왔다는 것이다. 기부자들은 땅으로도 혹은 창고에 쌓아놓은 것 중 조상에게서 나온 중요한 작품들도 기부할 수 있다.

아트 펀드는 1, 2차 세계대전 전후 영국의 많은 미술관과 박물관을 살렸다. 1930년 런던의 지하철에 ‘All Art Lovers Should Join(모든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참가해야 합니다)’이라는 광고를 통해 패트론의 대중화를 시작하고,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심지어 1933년부터는 아프리카 아트를 구입, 당시 미술관의 전문직들이 진행하지 못하던 미술사적 가치가 있는 일들을 적극 진행해왔다. 당시 아프리카 미술의 원시주의적 영향이 서양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들의 지원은 시대를 훌쩍 앞서갔던 것이다. 영국의 경우 2차대전 직후 소장품을 위한 국가 예산이 삭감됐을 때 이 펀드가 유일한 미술관 소장품 구입 소스였다.

사실 이 같은 얘기가 우리에게는 우리와 상관없는 남의 얘기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시대의 문화와 유물을 소중히 수집하고 인류 문화의 미래를 위해 컬렉션을 만드는 것을 선진국들은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단지 당대 작가들을 지원하거나 문화재를 수집하는 차원이 아닌,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새로운 가치기준과 평가를 만드는 기준을 제시한다는 것. 그것이 꼭 우리 것이든 아니든, 자국에 그러한 문화적 자산과 가치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국력이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시작점이 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이와 함께 국가 펀드이지만 정부의 지원과 연계되지 않은 독립적인 기관이라는 점 역시 매우 주목할 만하다. 이들이 하는 일은 꽤 다양하다. 단지 돈 많은 기업인들이 기부하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건 매우 잘못된 것이다. 특정 박물관을 지원하기 위한 캠페인을 열기도 하지만, 박물관 기증자들에게 세금 혜택을 주기 위해 정부에 로비를 한다던가, 이런 내용이 국회나 미디어에서 다루어질 수 있는 환경과 담론을 시작하는 일도 아트 펀드의 역할이다.

아트 펀드는 미술가·미술사가·컬렉터·경영인 등으로 구성된 상임위원회를 통해 운영되고 있다. 위원회 멤버는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골드 스미스대학 교수이자 현대미술 작가), 리처드 칼보코레시(헨리무어 파운데이션 디렉터), 데보라 스왈로(런던 코토드 아트 인스티튜트 학장) 등이다. 이 펀드 최고 책임자는 과거 데일리메일의 디렉터였던 데이비드 버레이로, 2004년도부터 아트 펀드의 기관장을 역임하고 있다. 이들 덕분에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1년에 1000만 파운드(약 200억원) 이상의 기금이 만들어지고 있다.

100년 넘게 지속해온 아트 펀드의 정신은 2000년 이후 모든 영국의 미술관·박물관 무료 관람의 모태가 됐으리라. 런던을 방문해본 사람이라면 무궁한 유물과 보물이 담겨 있는 국가 미술관과 박물관을 공짜로 이용하면서 상당히 놀랐을 것 같다.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이 10유로 내외,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20달러를 내야 하는 것과 비교해보면 더욱 그렇다. 보이지 않는 민간인들의 노력과 정부의 장기적 문화정책이 만들어낸 귀한 결과다.



런던 골드스미스대 미술사(MA), 시티대 예술행정(MA)을 공부하고, 지난 10년간 유럽과 아시아에서 다수의 현대미술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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