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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58> 일류 인물들이 만든 이류당②



▲1950년대 말 우파분자로 몰린 우쭈광, 딩충, 황먀오쯔(왼쪽부터)는 지금의 헤이룽장(黑龍江)성 싼장(三江)평원인 베이다황(北大荒)에 끌려가 3년간 노동을 했다. 1961년 베이징으로 돌아온 세 사람. 김명호 제공

극작가 우쭈광 집에선 저우언라이도 문화비평가



이류당(二流堂)이라는 말은 듣기도 좋고 부르기도 편했다. 기억하기도 좋았다. 전쟁 시절 문화예술인, 학자, 언론인들이 모여 먹고 마시고 마음에 담아 두었던 말들을 편하게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충칭에 상주하던 저우언라이(周恩來)·둥비우(董必武)·린뱌오(林彪) 등도 자주 얼굴을 내밀었다. 처음에는 공산당의 정책과 정치에 관한 얘기를 하려 했지만 딩충(丁聰)이 “정객(政客)들의 치국(治國) 행위가 정치다. 우리는 정객이 아니다. 소시민들이다”라고 한 다음부터는 혁명이나 정치에 관한 얘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저우언라이는 빈손으로 오는 법이 없었다. 항상 옷이나 담요 따위를 들고 왔다. 말이 없던 린뱌오는 가끔 “죽을 끓이면 천하에 별미”라며 공산당 근거지 옌안(延安)에서 수확했다는 대추와 좁쌀을 들고 와 슬그머니 놓고 가곤 했다. 국민당 남방 집행부 주임 왕신헝(王新衡)도 툭하면 황먀오쯔(黃苗子)를 따라 이류당을 찾았다. 공산당 쪽 사람들이 더 붙임성이 있었다. 문화인들은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좌경 유치병’ 환자가 되기 시작했다. 딩충은 증세가 특히 심했다.



중·일전쟁이 끝나자 이류당에 모이던 사람들은 충칭을 떠났다. 원래의 생활터전인 상하이와 홍콩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차오관화(喬冠華)는 “이류당은 장차 베이징에서 할 일이 많다. 문화인들을 위한 살롱을 만들어 휴식할 장소를 제공해 줄 곳은 이류당밖에 없다”며 미래를 기약했다. 후일 중국의 초대 유엔 대표로 주목을 받았던 ‘백발의 노신사’ 차오관화도 당시에는 이류당에서 날을 지새우던 국제문제 평론가였다.





▲쑨원(孫文)의 부인 쑹칭링(宋慶齡)은 딩충의 열렬한 팬이었다. 1939년 딩충의 항일화전 전시장을 방문했다.



이류당(二流堂)이라는 말은 듣기도 좋고 부르기도 편했다. 기억하기도 좋았다. 전쟁 시절 문화예술인, 학자, 언론인들이 모여 먹고 마시고 마음에 담아 두었던 말들을 편하게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충칭에 상주하던 저우언라이(周恩來)·둥비우(董必武)·린뱌오(林彪) 등도 자주 얼굴을 내밀었다. 처음에는 공산당의 정책과 정치에 관한 얘기를 하려 했지만 딩충(丁聰)이 “정객(政客)들의 치국(治國) 행위가 정치다. 우리는 정객이 아니다. 소시민들이다”라고 한 다음부터는 혁명이나 정치에 관한 얘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저우언라이는 빈손으로 오는 법이 없었다. 항상 옷이나 담요 따위를 들고 왔다. 말이 없던 린뱌오는 가끔 “죽을 끓이면 천하에 별미”라며 공산당 근거지 옌안(延安)에서 수확했다는 대추와 좁쌀을 들고 와 슬그머니 놓고 가곤 했다. 국민당 남방 집행부 주임 왕신헝(王新衡)도 툭하면 황먀오쯔(黃苗子)를 따라 이류당을 찾았다. 공산당 쪽 사람들이 더 붙임성이 있었다. 문화인들은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좌경 유치병’ 환자가 되기 시작했다. 딩충은 증세가 특히 심했다.



중·일전쟁이 끝나자 이류당에 모이던 사람들은 충칭을 떠났다. 원래의 생활터전인 상하이와 홍콩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차오관화(喬冠華)는 “이류당은 장차 베이징에서 할 일이 많다. 문화인들을 위한 살롱을 만들어 휴식할 장소를 제공해 줄 곳은 이류당밖에 없다”며 미래를 기약했다. 후일 중국의 초대 유엔 대표로 주목을 받았던 ‘백발의 노신사’ 차오관화도 당시에는 이류당에서 날을 지새우던 국제문제 평론가였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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