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겨울 통배추, 봄 김치찌개 깊은 맛의 힘

18년 시골생활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라면 여러 야채와 과일이 언제 제철인지를 알게 된 것일 게다. 아니 더 나아가 그 ‘제철’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제철을 맞추지 못한 작물이 얼마나 형편없어지는지를 알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시골에 내려오기 전까지는 배추가 사시사철 잘 자라는 식물인 줄 알았다. 배추·무·상추 같은 기본적인 채소는 도시의 시장에 가면 늘 지천으로 깔려있는 것이니, 서울내기인 내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이영미의 제철 밥상 차리기<2> 이제는 봄 김장이 필요하다

봄과 여름에 얼갈이배추나 열무김치를 먹는 것도, 그저 시원한 국물김치를 위해서 채 자라기 전의 어린 배추와 무를 뽑아 먹는 것인 줄 알았을 뿐이다. 그저 푸른 야채는 모두 봄에 싹 트고, 더운 여름에 쑥쑥 자라는 것인 줄 알았다. 매일 먹는 김치의 제철도 몰랐으니, 말 그대로 철이 없었다고나 할까. 직접 밭에 씨를 뿌려보니, 놀랍게도 배추와 무는 너무 더운 여름철에는 잘 자라지 않는 식물이었다. 시원한 날씨에서 잘 자라고, 얼지만 않으면 추위도 곧잘 견디는 식물이 바로 무와 배추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김장김치가 특별히 맛있는지도 그때야 깨달았다. 김장을 하는 11월 말과 12월 초야말로, 통배추와 무가 가장 달고 맛있는 때인 것이다. 추운 겨울에 땅에 묻어놓아서 김치가 맛있는 줄로만 생각했지, 그게 제철 재료의 맛인 줄 몰랐던 셈이다.

그러니 봄에 씨를 뿌려 여름에 키우는 통배추는 그리 맛이 없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알이 빡빡하게 밴 통배추는 ‘호배추’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외래종 배추라는 말이다. 지금도 씨앗 파는 가게에 가서 ‘조선배추’를 찾으면, 얼갈이배추 비슷하게 생긴 사진이 붙은 씨앗을 준다. 즉 조선배추는 호배추처럼 통통하게 결구(結球)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은 그저 여름에 얼갈이배추처럼 먹는 용도로만 키운다. 얼갈이배추보다 다소 잎이 넓고 길이가 짧게 자라는 조선배추는, 시장성이 작지만 맛이 좋아서 집에서 먹을 용도로는 이걸 키우는 사람이 적지 않다.

통배추를 봄과 여름에 키우기 힘든 것은 당연하다. 통배추는 3개월 이상 키워야 제대로 알이 들어차는데, 봄에 씨를 뿌려도 여름 되기 전에 수확하기가 쉽지 않다. 날이 너무 더우면 배추에 벌레와 병이 들끓고 잘 자라지도 않는다. 가까스로 6, 7월께 수확하도록 일정을 잘 맞추어 놓아도, 여름의 통배추와 무는 싱겁다.

날이 점점 더워지면서 배추가 너무 빨리 자라 버리기 때문이다. 김장용 통배추는 8월 초에 씨를 뿌려 100일을 키운다. 100일을 꼬박 채워 키운 ‘백일 배추’를 김장용으로는 최고로 친다. 가을에 자라는 배추는, 날이 시원해지면서 점점 푸르고 우람하게 자란다. 그러고는 찬 이슬과 서리가 내리면서 제 스스로 통통하게 결구를 한다. 날씨가 차가워지면서 배추는 봄에 꽃 피울 양분을 저장하기 위해 자기 몸에 단맛을 한껏 지니게 된다. 그러니 가을의 통배추가 맛있는 것이다. 날이 더워지면서 허우대만 훌쩍 커버리는 여름 통배추와 비할 바가 아니다.

3월 하순은 겨울의 통배추가 마지막으로 나오는 때다. 이 시기가 지나면 배추 속에서 꽃대가 올라온다. 그러고는 9월이 될 때까지는 싱거운 여름 통배추로 만족해야 한다. 여름에는 강원도 등지의 고랭지에서만 생산되고, 그나마 장마에 홍수라도 나면 배추 품귀 현상이 생겨 ‘김치가 아니라 금치’라는 소리가 나온다. 이렇게 통배추가 나오지 않는 철에는 약품을 사용해 긴 기간 저장한 배추들이 시장에 나온다는 말조차 있다.

그러니 요즘 배추 값이 훌쩍 뛰어 부담스럽긴 하지만 겨울의 맛있는 통배추가 남아있는 바로 이때에 봄 김장을 하는 게 현명하다. 봄 김장이란 걸 예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지만, 이제는 김치 냉장고가 보급되면서 충분히 가능해진 일이다. 뭐, 그렇다고, 겨울에 김장하듯 많이 할 필요는 없다. 이제부터 여름까지는 야채가 풍부하고 얼갈이배추, 열무, 오이 등 다양한 김치 재료들이 나오는 때이니, 열무김치나 오이소박이, 오이지 같은 여름 김치들을 담가 먹게 되기 때문이다.

그저 5, 6포기 정도 가볍게 담가 놓고 9, 10월까지 간간이 통배추 김치가 먹고 싶을 때 꺼내 먹으면 된다. 김치찌개나 김칫국, 김치전 같은 것은 확실히 김장 김치로 해먹어야 제 맛이다. 김치냉장고를 사용하면, 마치 겨울철 김장처럼 오징어나 생태 같은 해물을 넣어도 김치가 상하지 않는다. 자잘한 김장용 생새우가 시장에 나오지 않는 것이 좀 문제지만, 큰 새우를 갈아 넣거나 마른 새우를 가루로 내어 넣으면 맛을 낼 수 있다. 심지어 요즘은 봄에도 절인 배추를 인터넷으로 파는 곳이 있으니 그야말로 세상 좋아졌다.

사실 사시사철 통배추를 사다가 김치를 담가 먹어야 한다는 생각은, 최근 몇 십 년 동안 생긴 고정관념 중 하나다. 김치는 으레 통배추로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다, 그런 제철 모르는 소비자들을 겨냥해 최첨단 농사기술로 통배추를 생산해 시장에 내놓은 결과다. 그러나 그 최첨단 농사기술이라는 것의 상당수가 비료와 농약 등을 많이 쓸 수밖에 없는 방식이다. 철이 맞지 않는 데서 생기는 과도한 병충해 때문에 농약을 많이 쓰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든 통배추가 한여름에도 시장에 깔려 있으니, 소비자들은 또 아무 생각도 없이 사다 먹고, 결국 자연을 거스르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제철을 따지지 않는 철없는 소비자들은 결국 별로 맛도 없고 건강에도 그리 좋을 게 없는 재료를 사다 먹으니, 그게 무슨 좋은 일이겠는가. 여름에는 여름 야채로 담근 김치를 먹고 사는 게 순리고, 그것이 가장 맛있고 건강하게 먹고 사는 방법이다. 정 통배추 김치를 먹고 싶으면 겨울에 김장을 넉넉히 하거나 봄에 김장을 해 한번 더 하는 것이 현명하다.



대중예술평론가. 요리 에세이 『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와 『광화문 연가』 『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등을 펴냈다.

구독신청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