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조선왕실의궤 반환, 명성황후 해친 칼 ‘히젠토’ 환수 앞장 선 혜문 스님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사무처장, ‘문화재 제자리 찾기’ 사무총장, ‘히젠도 환수위원회’ 공동 대표…. 모두 가사(袈裟) 자락 휘날리며 뛰어다니는 혜문 스님이 갖고 있는 직함이다. 최근 중앙일보는 일본 왕실 도서관인 궁내청 서릉부에 소장된 『조선왕실의궤』 등 우리 문화재를 국내 언론 최초로 열람하고 보도했다. 혜문 스님은 2006년 한국인 최초로 궁내청 의궤를 열람한 뒤, 의궤환수위원회를 조직했다. 2006년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을 도쿄대로부터 돌려받은 것도 그가 2004년부터 ‘실록환수위원회’를 조직해 뛰었던 결과에 힙입은 바 크다. 혜문 스님은 올해 조선왕실의궤 반환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24일 서울 조계사 옆 전법회관에서 스님을 만났다.



우리가 찾으려는 건 유형의 유물보다 빼앗긴 민족의 자존심과 역사 정신

해외 한국 문화재 환수에 매진 중인 혜문 스님은 남양주시 봉선사에서 수행 중이다. [김도훈 인턴기자]
-여러 문화재 중 의궤에 힘쓰는 까닭은.



“의궤는 실록과 짝을 이루는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꽃이다. 실록이 글로 된 기록이라면, 의궤는 글과 그림으로 의전 절차를 기록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왜 많은 기록 중 의궤류를 일본 왕실로 옮겼을까. 그건 조선 왕실이 일본 왕실의 지배에 들어갔음을 상징하는 일이었다. 마지막 왕비의 슬픈 장례식에 대한 기록인 『국장도감』 의궤가 일본왕실로 옮겨진 것은 ‘인질’과도 같은 정치적 의미가 있다. 해방 60년이 되도록 왕실도서관에 유폐돼 있다는 건 문제 아닌가. 의궤를 돌려준다면 천황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 혹은 참회도 이뤄지는 것 아니겠나.”



-의궤는 여러 벌 제작한다. 궁내청에 있는 것이 유일본은 아닌데.



“실록은 이미 우리나라에 2077책이나 있었다. 거기에 오대산 사고본 47책이 보태진다고 해서 새로운 연구 성과가 나온다거나, 문화에 비약적으로 보탬이 되는 건 아니다. 궁내청 유물 중에도 인사동에서 몇 십 만원 주면 구입할 수 있는 게 있다. 그럼에도 찾아오고자 했던 것은 ‘종이와 먹으로 쓰인 실록’이 아니라 ‘빼앗긴 민족의 자존심’과 ‘실록에 기록된 역사의 정신’이었다. 유형의 유물보다 무형의 정신이 중요하다.”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데 쓴 칼 ‘히젠토(肥前刀)’ 반환 운동도 시작했다.



“명성황후 침전에 난입한 일본인 토오 가스아키가 일본 후쿠오카의 쿠시다 신사에 ‘히젠토’를 기증했다. 칼집에는 ‘늙은 여우를 단칼에 베었다’고 적혀 있고, 기증 관련 서류에는 ‘왕비를 이 칼로 죽였다’고 돼 있다. 그러나 살해에 가담한 일본인들은 1895년 히로시마 형무소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방면됐다. 쿠시다 신사는 소위 ‘닌자 학교’다(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건립했다). 그런 곳에 속국의 왕비를 벤 칼을 모신 일본의 의도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신사의 교주는 천황이다. 결국 이는 한·일간 근대사의 핵심에 도달해 있는 문제다.”



26일 서울 조계종 중앙신도회 교육관에서 ‘쿠시다 신사 소장 히젠토 환수위원회’ 발대식이 열렸다. 환수위 공동대표 혜문 스님이 ‘히젠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도훈 인턴기자]
-히젠토 반환 운동에 안중근 의사 순국 100년을 연결지었다.



“을미사변은 조선의 항일의병을 일으키고,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촉발했다.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첫 번째 이유가 ‘조선의 국모를 죽인 죄’였다. 히젠토는 업보를 담고 있는 흉물이다. 사죄의 의미에서 한국에 돌려보내거나, 파기해야 옳다. 일본은 한 나라의 왕비를 죽이고, 살인도구와 죽음에 대한 기록까지 가져갔다. 안 의사 순국 100년을 맞아 그 의미를 되새겨보자는 거다.”



-정치권에서도 대책을 세우겠다고 나섰는데.



“우리만 발표하면 뭐하나, 상대가 있는 게임인데. 실제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고 싶다. 해외에 있는 유물이 약탈인지 아닌지도 확인이 안되고 있는데.”



-약탈을 강조하면 돌아올 문화재도 숨어버린다고 걱정하는 시각도 있다.



“쉬쉬한다고 해서 돌려받은 게 한 점이라도 있나. 약탈 문화재에 대해 왜 단호하게 얘기하지 못하나. 정상적으로 수집한 것이라면 선의에 의해 기증받는 게 옳다. 일본의 국가기관이나 그에 준하는 기관의 약탈, 도굴 등으로 불법 취득한 문화재는 강력히 요구해 돌려받아야 한다. ‘환수’된 문화재는 엄밀히 말해 ‘북관대첩비’와 『조선왕조실록』 뿐이다. 모두 강력히 요구했기에 온 것이다. 실록도 기증의 형식으로 돌아왔지만 중간 과정에선 강경한 양측의 대립이 있었다.”



-보물 제1325호 고려범종, 영친왕비 일가 유물 등이 성공적인 환수 사례로 거론되는데.



“그건 약탈 문화재가 아니지 않나. 기증 받을 대상이지, 환수 대상은 아니다. 학자들도 약탈 문화재가 무엇인지 헷갈려 하는 거다. 불법성이 분명히 입증된 것만 약탈이라 할 수 있다.”



-조사해보니, 약탈임이 명확히 입증된 문화재가 몇 없더라.



“제일 황당한 것이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찾아와야 한다는 운동이다. 중국 둔황에서 출토된 유물인데 혜초가 우리나라 사람이므로 가지고 와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합리적 지성에 도달하지 못한 거다.”



-한국 사회에도 문제가 많은 셈이다.



“명성황후 ‘시해(弑害)’라는 용어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시해는 자기 임금이나 부모를 죽였을 때 패륜을 꾸짖으며 쓰는 단어다. 조선인이 자기 왕비를 죽였다는 의미가 담겼다. 그런데 우리는 시해가 높임말인 줄 안다. ‘낭인’이란 말도 써선 안 된다. 낭인은 ‘일정한 직업 없이 떠도는 사람’이다. 그러나 민비 살해에 개입한 일본인들은 ‘한성순보’ 기자 등 우익 지식인 엘리트였다. ‘낭인’이란 말엔 일본 정부와는 상관없이 몇몇 깡패가 저지른 일이라는 식의 관념이 담겨 있다. 소위 일제가 우리에게 심어준 ‘종살이 의식’이다. 그런가 보다 하고 대충 넘어가는 것,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허술함이다.”



-문화재 환수 운동에 나선 사연이 있나.



“은사 스님인 철안 스님이 2003년 경기도 남양주시 봉선사 주지로 부임하면서 봉선사 관할 27개 전통 사찰의 문화재 현황을 파악하는 소임를 맡기셨다. 그때 도쿄대가 소장한 실록의 불법적 유통 경로를 추적하게 됐다. 2004년 완전 공개된 한일협정 문서도 계기가 됐다. 1965년 우리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문화재 1432점을 반환 받고 청구권을 포기했다. 반환 받은 문화재가 무엇인지 궁금해 찾아보니 ‘짚신, 막도장, 우체부 모자’ 같은 항목이 포함됐더라. 그걸 받고 실록과 의궤를 포기하는 졸속 협상을 벌이고도 쉬쉬한 것이다. 일제로부터 자유로운 세대가 사명감을 갖고 접근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운동에 뛰어들게 만들었다.”



-한·일협정이 큰 걸림돌이다.



“2002년 북·일수교 당시 ‘문화재 반환에 대해 상호간 성실히 협력한다’는 조항이 들어갔다. 불교계는 2008년 평양에 방문해 문화재 반환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했다. 북한에 청구권이 살아있으니 남쪽을 대신해 의궤 반환을 청구하자는 데 합의했다. 일본은 어차피 청구권이 살아있는 쪽에서 요구하면 안 줄 수 없다. 그렇다면 북에 빼앗기다시피 주는 것보다 올해같이 의미 있는 해에 남한에 줘서 한일 관계를 의미 있게 만들어가는 게 낫지 않겠나. 일본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수행자로서 문화재 제자리 찾기의 의미는 .



“내가 이해하는 불교는 없는 것을 찾는 게 아니라 ‘잃어버린 것’을 찾는 것이다. 마음 속의 참마음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중생의 미혹한 삶이고, 잃어버린 참마음을 찾아가는 게 수행자의 삶이다. 불교 용어로는 ‘환지본처(還至本處)’다. 약탈문화재 환수 운동은 문화재의 제자리 찾기다. 결국 참마음의 제자리 찾기, 양심의 제자리 찾기 운동이라 생각한다. 역사적 질곡에 의해, 인간의 탐욕에 의해 제자리를 떠난 것들을 찾아오는 활동은 ‘불교 사상의 사회화’고, 또 하나의 수행 과정이라 생각한다.”



글=이경희 기자

사진=김도훈 인턴기자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