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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산책] 해골 위의 십자가

3월 28일은 예수님의 죽음을 기리는 고난주일이고, 4월 4일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깨트리고 다시 사신 부활주일이다.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인간을 위해 죽음의 형벌을 대신 받으신 고난의 형틀인 동시에, 그 형틀의 죽음을 깨트린 부활의 상징이기도 하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도 기독교 하면 십자가를 연상할 정도다. 그러나 가톨릭과 개신교의 십자가가 동일하지 않다. 가톨릭의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못 박혀 있는 반면 개신교의 십자가에는 못 박힌 예수님이 없다. 가톨릭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고난을, 개신교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부활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 분리될 수 없다. 부활로 이어지지 않는 죽음의 고난은 무의미한 죽음일 뿐이고, 죽음의 고난을 통과하지 않은 부활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고난을 강조하는 가톨릭의 십자가도, 부활을 내세우는 개신교의 십자가도 아쉬움을 주기는 매한가지다. 만약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통합하는 제3의 십자가를 만든다면 어떤 모양이 될까?



예수님께서 못 박혀 돌아가신 십자가는 ‘골고다’ 동산에 세워졌다. 골고다는 우리말로 ‘해골’이라는 의미다. 그 동산의 이름이 왜 해골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동산의 모양이 해골과 흡사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예부터 그곳이 사형집행장이었기에 죽은 죄수들의 해골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 그곳에서 인류 최초의 인간인 아담의 유골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라는 황당한 전승도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사는 우리로서는 2000년 전 그 동산이 해골로 불리게 된 정확한 유래를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지명의 유래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못 박혀 돌아가신 십자가가 이스라엘 넓고 넓은 천지에서 유독 해골이란 이름의 동산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 그 자체다.



[그림=김회룡 기자]
비잔틴시대의 성화 가운데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를 진짜 해골 위에 그린 것이 있다. 그 성화를 그린 작가는 골고다를 단순지명이 아닌 문자 그대로 해골로 이해한 것이다. 해골 위의 십자가-이것이 성경이 전해주는 십자가요,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이 통합된 제3의 십자가다. 해골은 죽음이다. 그것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죽음인 동시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이다. 죄로 인해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진 인간의 해골 정수리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꽂혔다. 인간이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대신 받기 위해 못 박히신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예수님의 붉은 선혈이 흘러내린다. 십자가를 타고 흘러내린 예수님의 피가 해골을 적신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쏟은 예수님 역시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깨트리고 다시 부활하시고, 십자가를 타고 흘러내린 생명의 피에 흠뻑 적은 해골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해골의 정수리에 꽂힌 십자가를 타고 오르며 영원히 부활한다. 방대한 분량의 성경 내용을 단 한 커트의 영상으로 표현하면 해골 위의 십자가,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해골 위의 십자가를 믿을까? 자신이 해골에 지나지 않음을 자각하는 사람이다. 오래 전 미술전문책 『Illusion』에 눈길을 끄는 그림이 게재되었다. 한 귀부인이 온갖 화장품이 놓여 있는 화장대 앞에서 정성스럽게 얼굴을 가꾸는데 귀부인을 비춰주는 거울이 해골이었다. 인간의 실상을 그보다 더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림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 그림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살아있는 모든 인간은 실은 미래의 해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오늘도 사람들은 온갖 정성을 다해 자신을 치장한다. 좀 더 예쁘고 멋지게 보이기 위함이다. 그러나 긴 안목에서 보면 그것은 미래의 자기 해골을 치장하는 것이다. 오늘 이 땅에 숨 쉬는 사람 가운데 100년 후에 해골 아닌 사람이 있겠는가? 100년은 고사하고 몇 년이나 몇 달 혹은 며칠 후, 아니 오늘 당장 해골의 나락으로 떨어질 사람도 부지기수다. 이처럼 자신이 살아 있는 것 같지만 걸어다니는 해골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은 사람은 생명의 결핍을 자각하고 자기 해골의 정수리에 생명의 십자가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흘러내리는 예수님의 피를 수혈받아 죽음의 해골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성경은 ‘에노스’ 때에 인간이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음을 밝혀준다(창4:26). 왜 그 이전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지 않았을까? 왜 인간은 에노스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자발적으로 불렀을까? 히브리어로 에노스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술 공장에서 나오는 제품은 모두 술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도수가 높은 술과 낮은 술, 비싼 술과 싸구려 술의 차이뿐이다. 술 공장 설비로는 절대로 화장품을 만들 수 없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금단의 열매를 범하므로 죄인이 되었다. 이를테면 죄 공장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 죄 공장에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본질적인 죄인으로 태어난다. 차이가 있다면 도덕적인 죄인과 비도덕적 죄인, 유식한 죄인과 무식한 죄인, 잘난 죄인과 못난 죄인, 돈이 많은 죄인과 가난한 죄인, 피부색이 하얀 죄인과 검은 죄인의 차이밖에 없다. 불완전한 죄인들이 사는 세상이 늘 문제투성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인간이 타고난 죄의 DNA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에노스임을 깨달았을 때, 자신이 고작 해골일 뿐임을 통감했을 때, 그래서 생명의 결핍을 절감했을 때, 인간은 그제야 비로소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해골의 정수리에 세워주셨고, 십자가에서 죽음의 형벌을 대신 받은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공장으로 부활하셨다. 그 결과 그 어떤 해골도 십자가를 통해 그 생명공장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참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교회에 다녀도 자신이 해골임을 자각하지 못한 사람에게 십자가는 장식품에 불과할 것이지만, 자신이 해골임을 아는 사람에게 십자가는 영원한 생명에 자신을 덧붙이는 더하기(+) 표가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해골을 살리기 위해 해골 위의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죽음의 해골에서 부활하셨다.



이재철 100주년기념교회 목사

그림=김회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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