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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64) 틈새를 노린 북한군의 공격

1950년 9월 초 낙동강 전투에서 붙잡힌 북한군 포로가 미군의 지프 위에 앉아 후송을 기다리고 있다. 북한군 포로의 목에 ‘전쟁 포로’라는 표식이 걸려 있다. 북한군의 공세는 이해 8월 말에 접어들면서 국군과 유엔군의 방어에 막혀 크게 꺾이기 시작했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천평동 계곡은 적군의 거듭된 공세에도 끄떡없었다. 적의 공세는 발악적이었다. 그러나 늦여름의 무더위에 지나지 않았다. 새벽에는 이미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여름 끝의 그런 더위 말이다. 1950년 8월 18일부터 적의 13사단이 가세해 다부동 전선을 뚫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미군의 거센 화력과 고지에서 혈전을 펼쳤던 국군의 저항으로 더 이상 남하하지 못했다. 적의 공세는 23일까지 이어져 아군과 7차례의 거친 공방전이 이어졌지만 전세는 이미 역전됐다.

적에게 공간을 내주고, 우리는 시간을 벌었다. 우리는 적에게 대한민국의 많은 영토를 내줬지만 시간 싸움에서는 결국 북한군이 쫓겼다. 미 증원군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8월 하순에 접어들면서 미 본토의 2사단이 부산에 상륙했다. 홍콩을 떠난 영국군 27여단도 그 뒤를 따라 한반도에 들어왔다.

그러나 김일성의 독촉이 빗발치면서 북한군은 틈새를 노리는 전술을 구사하며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북한군이 포탄을 날려 대구를 공황상태에 빠뜨리게 했던 곳이 가산산성이다. 이곳으로 북한군 1개 연대 병력이 또 모여들었다. 다부동과 천평동 계곡의 아군 주저항선을 돌파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적이 우회 전술을 쓴 것이다. 이곳을 뚫어 우리 국군 1사단의 후방을 교란한다는 계획이었다.

천평동 계곡에 포진한 마이켈리스 대령의 미 27연대 남쪽으로는 폴 프리먼 대령이 이끄는 미 23연대가 지키고 있었다. 8월 22일 북한군 1사단 14연대가 이곳으로 접근해 기습작전을 벌였다. 북한군은 오후 늦게 이곳에 박격포를 집중적으로 쏘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포격으로 장교 네 명과 하사관 두 명이 전사하고 말았다. 미군은 그러나 침착하게 대응했다. 후방의 포병은 전방의 대대본부가 이동하는 중간에도 지원사격을 이어갔다.

사단 CP가 있던 동명동 남쪽에도 적의 포탄이 떨어졌다. 미군의 2개 야전포병대대가 머물던 곳이다. 다부동의 위기를 잘 넘김으로써 적의 공세를 결정적으로 꺾기는 했지만 적의 기습으로 후방이 자칫 교란될 국면을 맞게 된 것이다. 아무래도 가산산성이 문제였다. 그곳으로 신속하게 병력을 투입해 적을 몰아내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던 셈이다.

몇 달 전만해도 학생이었던 어린 학도병들도 전쟁을 겪으며 강해져갔다. 사진은 학도의용군의 표식.
미 23연대가 반격에 나섰다. 모든 화력을 적이 있는 곳으로 집중했다. 항공기와 포병대대를 동원해 전방에 나선 적과 가산산성에 사격을 퍼부었다. 우리 1사단 11연대는 그때의 한 장면을 기억하고 있다. 미군의 야전포병대대를 지켜보고 있던 우리 사단 11연대 본부요원들이 목격한 내용은 이랬다. 적의 포탄이 미 야전포병대대 안으로 떨어지면서 미군 병사 한 명이 2~3m 떠올랐다. 포격에 맞은 것으로 보였다. 먼지와 함께 공중에 붕 떠올려진 그 병사 모습을 보면서 11연대 본부요원들은 ‘아이쿠, 맞았구나’라면서 안타까워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공중에서 땅에 ‘풀썩’ 하면서 떨어진 그 병사는 거짓말처럼 다시 일어섰다. 그러곤 곧장 포대로 달려가 사격을 계속했다. 이 모습을 목격한 11연대 본부요원들이 제 일처럼 나서서 환호성을 올리면서 박수를 쳤다고 한다.

미군은 가산산성에 공중 폭격을 했다. 모두 40t의 폭탄을 퍼부었다고 했다. 적은 엄청난 화력에 밀려 잠시 산성을 비우고 그 북쪽으로 물러나기도 했다. 국군 7사단 3연대의 1개 대대 병력도 증원됐다. 이들은 본격적으로 산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적의 완강한 저항을 뚫으며 이들은 전진했다. 4개 중대를 일렬로 세운 뒤 좌측의 2개 중대가 먼저 20보를 전진하면서 M1 소총을 8발(1개 클립에 8발이 들어 있어 이를 연발로 쏘고 나면 클립을 갈아야 했다)을 쏜 뒤 엎드리면 우측이 다시 전진하는 식이었다.

27일 가산산성 방면을 향한 공격은 끝났다. 가산산성에 진출했던 북한군 14연대는 이로써 완전히 무너졌다. 아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 병력은 400여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군의 피해도 심각했다. 1사단에 파견됐던 8사단 소속 10연대 1대대의 경우가 그랬다. 1대대 4중대는 전체 인원 180여 명 중 전투가 끝난 뒤 몸이 성한 사람은 장교 한 명과 병사 1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 같은 내용은 『다부동 구국전투사』에서도 전하고 있다.

사단 수색대에서 생긴 일화가 하나 있다. 10연대 3대대가 가산산성을 공격할 때였다. 적이 집결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마침 무전기가 고장 나 있었다. 수색대원을 사단사령부에 보내 이를 알려야 했다. 첩첩산중의 한밤중이었다. 학도병 출신의 나이 어린 하사 한 명을 연락병으로 선발했다. 그런데 선발된 수색대원은 갑자기 울음보를 터뜨렸다. 밤중에 적이 출몰하는 산길을 가기가 겁이 났던 것이다. 사단 수색대에서는 이 ‘학도병의 울음’이 내내 화젯거리였다고 했다.

생사를 알 수 없는 전장에 몸이 놓이면 가장 먼저 드는 것은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감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두려움으로 단련되어 가고 있었다. 학업을 접어두고 일선으로 달려온 학도병, 쟁기를 던지고 총을 집어든 농군 출신 장병 모두가 그랬다. 따지고 보면 전쟁이 벌어지던 6월 25일 아침, 적이 밀려오는 임진강 철교 너머를 보면서 미군이 건넨 ‘럭키스트라이크’ 담배를 거듭 피워 물던 나도 그랬다. 그런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선 군대는 강해지게 마련이다. 낙동강 전선에서 거듭되는 혈투를 겪은 국군은 어느덧 강한 군대로 성장하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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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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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