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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민' 강조한 공자, 집권자에겐 버릴 수 없는 가치

공자의 고향 중국 산둥성 취푸에서 열린 공자 탄생 2556주년(2005년) 기념식에서 명나라 복장을 한 중국인들이 제례 행사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공자는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아침 일찍 뒷짐을 진 채 마당을 거닐며 노래를 불렀다. “태산이 무너지려는가? 들보가 허물어지려는가? 철인이 시들어 떨어지려는가?” 노래를 다 부른 공자는 천천히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마주 보고 앉았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자공(子貢)이 노래를 듣고 “태산이 무너진다면 나는 장차 무엇을 우러를 것이며, 들보가 허물어지고 철인이 시들어 떨어진다면 나는 장차 무엇을 따를 것인가? 선생님께서 곧 큰 병이 나실 것 같구나”라고 탄식하며 빠른 걸음으로 스승의 방으로 들어갔다.

공자, 그 영원한 생명력

공자의 마지막 모습에 담긴 힘
공자는 기다렸다는 듯 “너는 왜 이리 늦게 왔는고? 나는 은(殷)나라 사람이다. 내가 지난밤에 꿈을 꾸었는데 두 기둥 사이에 앉아서 제물을 받더구나. 세상에 밝은 임금이 일어나지 아니하셨으니 천하에 그 누가 나를 높여 줄까? 나는 곧 죽을 것이다”고 했다. 그리고 병상에 누운 지 7일 만에 돌아가셨다. 『예기』 단궁편이 전하는 공자의 마지막 모습이다. 주(周)나라 주공이 세운 노(魯)나라 곡부(曲阜) 땅에서 태어나 재상까지 지낸 공자는 스스로 은나라의 후손임을 밝힌 것이다. 동이족 예법에 따라 장례가 치러지는 자신의 모습을 꿈속에서 미리 본 공자는 덕치(德治)는 뒤로한 채 약육강식을 일삼는 패권(覇權) 정치에 대해 마지막까지 깊이 우려하며 떠났다.

공자는 철환주유(轍環周遊)를 하다가 과부로부터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도 무섭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앞날의 정치에 희망을 걸기가 어려웠다. 아닌 게 아니라 공자 사후 260여 년 후 천하통일을 이룬 진시황제(秦始皇帝)는 체제 정비를 위해 반대 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주된 대상은 왕도정치의 실현을 주창하는 유가(儒家) 세력이었다. 공자가 편찬한 책들을 불사르고 그의 학문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지식인들을 생매장하는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저질렀으나 그의 통일국가는 15년 만에 망했다.
앞날을 예견한 공자는 ‘천하에 그 누가 나를 높여 줄까?’라고 염려했다. 그러나 공자의 염려는 곧 불식된다. 새로 들어선 한(漢·BC 202∼AD 220) 왕조는 덕치를 근본으로 하지 않는 정치가 결코 오래갈 수 없음을 깨달았으며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마음을 달랠 통치철학이 필요했다.

공자는 “백성들을 다스리는 데 위정자가 먼저 솔선수범하여 정치를 하면서 법령과 제도를 통해 잘 따르도록 해야지 백성들이 잘 따르지 않는다고 형벌로 사회질서를 이룬다면, 모든 백성들은 그 형벌을 면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게 된다.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써 가지런히 하게 하면 부끄러움을 알고 또한 지극해진다”(『논어』 위정편)고 간파했다.

"옛 것을 전술하되 창작은 안한다"
새로운 나라를 세운 한 왕조는 그러한 공자의 위민사상(爲民思想)이 필요했다. 왕도정치의 바탕이 되는 유교 세력에 눈을 돌린다. 국가를 오래도록 보전하려면 법치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기에 유교 지식인들과 정치적 타협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전시대에 분서갱유 속에서 스러진 유생들을 사면 복권시키고 칠서벽경(漆書壁經), 곧 진시황제의 탄압을 피해 옻칠해서 벽 속에 감춰 뒀던 유학 경전들을 찾아내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유교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공자가 후대 들어 학문의 종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긴 저작물(著作物)들 덕분이다. 역대로 공자를 계왕성개래학(繼往聖開來學·앞서 가신 성인을 잇고 후학들을 위해 문을 열어 줌)이라고 하여 오히려 요·순 임금보다 낫다고 평가하는 것도 모두 저작물들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내외 학자들은 공자가 지은 글들은 아예 없다거나 위서(僞書)이기에 볼 가치가 없고, 심한 경우는 공자를 알 수 있는 것은 재전제자(再傳弟子)들이 쓴 『논어』 한 편만이 유일할 뿐이라고까지 한다. 한마디로 논박한다면 뜻글자로 이뤄진 전적들을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하고 이치가 통하지 못하는 데서 생겨나는 문제들인 듯하다.
공자 스스로가 “전술은 하되 창작은 아니하며, 믿고 옛것을 좋아함을 그윽이 우리 노팽과 견주노라”(述而不作 信而好古 竊比於我老彭, 『논어』 술이편)고 했다. 공자는 성현들의 훌륭한 옛 내용이 많기에 스스로가 더 쓸 것은 없고, 다만 새롭게 정리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피력하면서 은나라의 어진 대부였던 노팽을 비유하여 매우 겸손하게 말한 것이다.

옛날의 선비는 국가로부터 녹을 받아 살림을 꾸렸기에 벼슬이 없다면 살기가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공자는 젊어서 미관말직인 위리(委吏)라는 창고지기 벼슬과 사직리(司職吏)라는 종묘제사에 쓸 가축을 기르는 축사 일을 맡아 보기도 했는데, 언제 어디서나 배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철저한 고증으로 문헌 정리한 공자
예법에 관해 공부하다가 미진한 점이 있자 주나라에서 도서관 사서 직책인 주하사(柱下史)를 맡고 있는 노자를 찾아가 묻기도 하고 문헌을 수집해 왔다. 우리는 고증에 철저했던 공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논어』에도 고증에 충실한 공자의 모습이 나온다. “하나라 예를 내 말할 수 있으나, 후예인 기나라가 족히 증거 대지 못하며, 은나라 예를 내 말할 수 있으나 후예인 송나라가 족히 증거를 대지 못함은 문헌이 부족한 까닭이니 족하면 내 능히 증거를 대리라”(팔일편 제9장)고 했다. 이 말뜻은 무엇일까? 문헌으로 정리하려면 구전되는 말만 갖고는 어렵다는 것이다. 공자가 평생을 두고 문헌을 정리했음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공자 당시에 공부는 대부분이 구전이었다. 종이로 된 책은 한나라 이후부터 있었고, 그전에는 일일이 필사한 죽책이 전부였기에 책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더욱이 당시에는 이미 나라의 기강이 무너져 시서예악(詩書禮樂)이 제대로 정리될 수 없었다. 이것은 결국 국가가 백성들에게 제시할 예법 체계가 무너져 있다는 뜻이다. “천자가 아니면 예를 의논하지 못하며, 법도를 짓지 못하며, 글을 상고하지 못한다”(非天子 不議禮 不制度 不考文,『중용』 제28장)”는 것을 알고 있던 공자였기에 나라 임금과 더불어 정사를 펼치기를 기대하며 문헌을 모아 나갔다. 제자인 자공이 공자처럼 훌륭한 선생이 재야에 묻혀 있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여기에 아름다운 옥이 있으니 궤에 넣어 감춰 둘까요? 좋은 값을 흥정해 팔까요?”라고 물었을 때 공자는 “팔아야 할까, 팔아야 할까? 나는 값을 기다리는 자로다”고 답변한 것은 시세에 아부하며 벼슬자리를 구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자신 같은 사람을 알아보고 등용해 쓸 밝은 임금이 아니라면 함께 더불어 정치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더 이상 도가 전파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공자는 철환주유를 마치고 노나라로 돌아와 육예(六藝)인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악경』 『춘추』 등의 문헌을 정리 찬술했다. 하지만 공자가 벼슬자리에 올라 시행하면서 정리한 글이 아니었기에 자신이 쓴 글을 빈말, 곧 ‘공언(空言)’이자 ‘공문(空文)’이라고 낮춰 겸손히 말했다.

육예에 대해 공자는 “그 사람됨이 온유하고 돈후하면서도 어리석지 않다면 시(詩)에 이해가 깊은 자요, 소통하고 먼 것까지를 알면서도 꾸미지 않는다면 서(書)에 깊은 자요, 도량이 넓고 성정이 조화로우면서 순하고 어질면서도 사치하지 않는다면 악(樂)에 깊은 자요, 정결하고 정미하면서도 구실을 붙이지 않는다면 역(易)에 깊은 자요, 공손하고 검소하며 장엄하고 공경하면서도 번거롭지 않다면 예(禮)에 깊은 자요, 말을 붙임에 사물을 비교하여 판단할 줄 알면서도 어지럽히지 않는다면 춘추(春秋)에 깊은 자라”(『예기』 경해편 제1장)라고 했다.

특히 『춘추』는 공자의 마지막 저술로, 맹자가 “세상이 쇠하고 도가 미미하여 삿된 말과 폭행이 또 일어나 신하가 그 인군을 죽이는 자 있으며, 자식이 그 아비를 죽이는 자 있으니 공자가 두려워하시어 『춘추』를 지으셨으니 『춘추』는 천자의 일이라”(『맹자』 등문공하편 제9장)라고 했다. 노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위정자들의 일을 재단해 적었기에 공자는 “나를 아는 자도 그 오직 춘추이며 나를 죄주는 자도 그 오직 춘추라(知我者 其惟春秋乎 罪我者 其惟春秋乎)”라고까지 했다.

또 다른 부활, 또 다른 우려
유학 경전은 송나라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육예를 중심으로 공부해 갔는데 사서삼경 체계가 완성된 것은 남송 때 주자(朱子·1130~1200)에 의해서였다. 유교는 청나라에 들어와서는 서구 문화를 만나면서 좀 더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돼 가나 군대를 앞세운 서구 문물에 무릎을 꿇게 되면서 2000여 년 동안 국교로 숭상됐던 유교는 단절되고 청산 대상이 됐다. 공자 역시 타도 대상이 됐다가 다시 부활되고는 있으나 중국이 지나치게 국수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어 우려된다. 철환주유 시절 공자가 시를 인용해 제자들에게 물었던 “뿔소도 아니며 범도 아닌 것이 광야를 헤맨다 하니 우리의 도가 잘못된 것인가?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사기』 공자세가)라고 한 구절이 생각난다.


가원(家苑) 이윤숙은

현재 사설 유학교육 기관인 경연(庚衍)학당 대표이며, 『종요의 대서사시 천자문 역해(易解)』를 시발로 ‘유학경전 역해(易解) 총서’를 집필하고 있다. 총서 두 번째인 『주역으로 풀이하는 논어 역해(易解)』 또한 주역에 의거해 논어를 풀이했다. 경연학당 블로그에 사서삼경 강의를 무료로 개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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