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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티첼리, 데미언 허스트...‘정열의 투자’ 기다리는 걸작들

1 수만 송이 흰장미로 장식된 전시장 입구.
보물급 예술품들이 모이는 곳, TEFAF
“한마디로 묘한 기분이 드는데요. 박물관에 들어와 보물들을 보는 기분인데, 이런 보물급 작품이 모두 팔기 위한 것들이라는 거죠.”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에서 열리는 유러피언 아트 페어(The European Fine Art Fair·이하 TEFAF·3월 12~21일)를 관람하면서 프랑스의 TV 기자가 필자에게 들려준 소감이다. 수도인 암스테르담에서 약 200㎞쯤 떨어진 소도시 마스트리흐트는 TEFAF가 없었더라면 그저 유럽의 한 유서 깊은 소도시쯤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1975년 네덜란드의 앤티크(골동품) 상인들이 모여 첫 페어를 시작한 이래로 TEFAF는 현재 열리고 있는 세계적인 아트 페어들의 모델이 돼 왔다. 페어가 열리는 기간이면 세계 정상급 앤티크상과 화상, 컬렉터는 물론 박물관·미술관 관계자, 각국의 부호들이 마스트리흐트로 모인다. 시내 호텔 방이 일찌감치 동이 난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필자도 결국 방을 얻지 못해 기차로 30분 거리인 벨기에의 리에주에서 묵어야 했다.

유럽 갑부들이 찾는 아트 페어,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 테파프(Maastricht TEFAF)를 가다


오프닝에 맞춰 페어가 열리는 MECC(Maastricht Exhibition & Congress Centre)에 도착했다. 아르데코 풍의 검정과 흰색의 기둥이 도열한 입구가 분위기를 압도했다. 페어장 곳곳은 수만 송이의 장미꽃과 튤립으로 장식돼 있었다. 새하얀 상의를 입은 웨이터와 웨이트리스들이 오프닝 내내 샴페인과 정성스럽게 만든 핑거 샌드위치, 카나페를 일사 불란하게 서빙하고 있었다. 성장을 한 VIP 수백 명이 마스터피스들 앞에서 진지하게 감상을 하면서 구입을 고려하고 있었다. “오프닝이 있었던 12일 첫날에만 입장객이 1만500명에 달했으며, TEFAF 설립 이래 가장 많은 수였다”고 TEFAF 측은 다음 날 발표했다.

철저한 감정은 퀄리티를 보장하는 열쇠
‘유러피언 아트 페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아트 페어는 초기에는 유럽의 앤티크상과 갤러리가 주로 참가했다. 하지만 올해의 경우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우루과이 등 17개국에서 263개 갤러리가 참가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국제갤러리가 지난해부터 참가해 오고 있다. 선사시대 유물부터 데미언 허스트의 실험적인 현대미술 작품들, 옛날 도자기부터 20캐럿짜리 다이아몬드에 이르기까지 미술사와 문화재사를 장식할 만한 5만여 점의 작품이 손님을 맞고 있다. TEFAF의 특징은 앤티크와 모던, 장식 미술품들이 모두 하나의 페어 안에 모여 있다는 것이며 가장 큰 강점은 이들 모두가 엄선된 퀄리티와 ‘족보’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2 산드로 보티첼리의 ‘성모 마리아와 예수님께 경배하는 세례자 요한’(1493~95), 패널에 템페라, 47.6x38.1㎝. 존 D 록펠러 주니어가 소장했던 작품으로 1500만 달러에 나왔다.3, 4, 5 TEFAF 전시장 이모저모.
특히 고미술품들이 많이 출품되기 때문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작품의 진위다. 그래서 페어가 시작되기 전에 이를 철저히 검증하기 위한 감정 절차가 이뤄진다. 베팅(Vetting)이라고 불리는 이 절차 동안 168명의 세계적인 전문가로 구성된 26개의 감정위원단이 출품작 하나하나의 진품 여부와 출처, 상태를 점검하는 작업을 거친다. 만약 이들 눈에 TEFAF 수준에 맞지 않는 작품이라고 판단되면 그 작품은 전시될 수 없다. 또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도난 예술품 데이터베이스를 가진 ‘Art Loss Register’에서 출품작 중 도난품으로 신고된 작품이 있는지를 검색해 ‘장물’을 구입하는 사례가 없도록 예방한다. 이러한 과정으로 인해 TEFAF는 세계 최고의 예술품 박람회라는 명성을 이어 가고 있는 것이다.

6 영국 작가 숀 헨리의 ‘스탠딩 맨’(2009), 브론즈, 202㎝사진 TEFAF 제공, 정형모 기자
새 주인 기다리는 1%의 작품들
페어 기간 열린 미술 시장 콘퍼런스에서 -2007
~2009 미술시장 리포트(The International Art Market)의 저자이자 경제학자인 클레어 맥 앤드루(Claire Mc Andrew)는 “기존에 비싼 차와 요트를 사던 부자들이 이제는 장기적으로 수익성도 있으면서 ‘정열의 투자’라고 불리는 미술품 투자에 돈을 쓰고 있다”고 밝혔다. 그녀에 따르면 2007~2009년 시장에서 팔린 미술품들 중 판매량이 가장 많았던 작품은 가격대가 낮은 작품들이었으며, 100만 달러 이상 팔린 작품들의 비율은 전체 미술 시장의 1%에도 못 미친다고 한다.

그런데 TEFAF는 확실히 이 1%의 작품을 팔기 위한 페어임에 틀림없다. 가장 화제를 모았던 작품은 런던과 뉴욕에 갤러리를 가지고 있는 디킨슨 갤러리(Dickinson)에서 내놓은 ‘성모 마리아와 예수님께 경배하는 세례자 요한’. 르네상스 화가인 산드로 보티첼리가 1493년에서 1495년에 그렸다고 추정되는 그림이다. 록펠러 가족이 과거에 소장한 적이 있어 이 그림은 ‘록펠러 마돈나’라는 별명으로 불리는데 판매가는 1500만 달러(약 170억원)였다. 디킨슨 갤러리는 이외에도 ‘뮤지엄 퀄리티’라고 불리는 푸생과 고갱, 르누아르 작품들을 무더기로 선보이면서 최고 딜러의 파워를 과시했다.

페어가 오픈한 지 두 시간 만에 바스키아의 작품을 240만 달러(약 27억원)에 판매한 뉴욕 갤러리인 반드 웨이(Van de Weghe)와, 섕 수틴의 그림을 한 유럽의 개인 컬렉터에게 50만 유로(약 7억7000만원)에 판매한 뮌헨 출신 갤러리인 갤러리 토마스(Gallery Thomas) 등은 순조로운 스타트를 보였다. 몇몇 뮤지엄도 기회를 놓칠세라 구입에 나섰다. 워싱턴DC의 국립미술관은 런던에서 참가한 존 미첼 파인 페인팅(John Mitchell Fine Painting)으로부터 17세기 네덜란드 화가인 아담 반 브랜(Adam Van Breen)의 1611년 작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이라는 풍경화를 100만 유로(약 15억원) 가까운 금액을 주고 구입했다.

이렇게 첫날부터 호조를 보인 딜러와 화랑이 있는가 하면, 뜸을 들이며 구입을 망설이는 컬렉터들의 결정을 기다려야만 하는 작품도 많았다. “희귀한 마스터피스 급 예술품이지만 워낙 고가이기 때문에 최종 판매가 결정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 한 런던 주재 아트 딜러의 귀띔이다. 지난달 1억400만 달러(약 1178억원)에 팔려 가장 비싸게 판매된 예술작품 기록을 세운 자코메티의 작품인 ‘세 명의 걷는 남자(Trois hommes qui marchent)’는 몬트리올 갤러리인 랑도 파인 아트(Landau Fine Art)에서 2500만 달러(약 283억원)에 내놓았는데 선뜻 작품을 예약하는 컬렉터는 보이지 않았다. 혼치 어브 베니슨(Haunch of Venison)에서 야심 차게 1200만 달러(약 136억원)의 가격표를 붙인 데미언 허스트의 돼지 포름알데히드 작품 ‘This little piggy went to the market, this little piggy stayed home’(1996)도 미디어와 관람객의 많은 관심 속에서 판매 소식을 기다리게 했다.

미술 시장 회생에 대한 기대감 충만
“올해 시장은 지난해보다 좋아졌다. 진정한 컬렉터들이 TEFAF에는 많다. 경제위기 동안 움츠렸던 이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은 매우 신중하다. 좋은 작품을 좋은 가격에 내놓는 것, 이 단순한 진리가 판매를 이뤄 낸다”고 한 벨기에 갤러리 오너는 블룸버그TV와 인터뷰에서 밝혔다. 2월 런던에서 있었던 메이저 경매회사들의 인상파와 현대미술 경매의 성공을 바로미터로 2010년 미술 시장에 거는 기대와 희망의 무드가 TEFAF에도 여실히 퍼지고 있었다. 이번 TEFAF를 돌아보면서 필자는 예술품이 지니게 되는 시간의 진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됐다. 역사와 문화를 담고 한 예술가의 영혼을 간직한 예술품의 가치는 결국 시간이 흐르면 그 빛을 보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이번 TEFAF 오프닝 날에는 깜짝 사고도 일어났다. 페어가 오픈하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1층 전시장의 전기가 약 7분간 나가면서 홀 안이 칠흑같이 깜깜해졌다. 다행히 아무런 도난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페어 참가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불이 켜지자 나는 서류가방에 집어 넣기 딱 좋은 크기의 ‘록펠러 마돈나’가 원래 자리에 제대로 걸려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1500만 달러짜리 그 그림은 무사히 걸려 있었다.



런던 크리스티 인스티튜트에서 서양 미술사 디플로마를 받았다. 현재 파리에 살면서 아트 컨설턴트로 일한다. '런던 미술 수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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