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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59) 학도병의 수첩

학도병의 편지- 이우근(李佑根)



열 번 뺏고 뺏긴 328고지 … 학도병 희생으로 태극기 꽂다

어머니가 내내 아들의 안전을 빌고 빌었던 정화수라도 떠온 것일까. 전쟁이 불붙은 일선으로 떠나는 아들에게 물 한 모금이라도 더 먹이려는 어머니, 바가지를 받아 든 아들의 표정이 간절하고 애처롭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전선으로 향하는 대구역 앞 신병 대열에서 찍은 사진이다. [연합뉴스]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어제 내복을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왜 수의(壽衣)를 생각해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



미군과 국군이 소대 규모의 부대를 서로 상대 진영에 파견해 한·미 양국 군대가 어깨를 맞대고 연합작전을 펼쳤던 곳이 낙동강 전선 303고지(작오산)였다(3월 6일자 49회). 그 동쪽으로 328고지가 있다. 유학산 못지않게 피비린내 나는 격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우리 국군 1사단 15연대가 그곳을 맡았다. 그들은 분전(奮戰: 있는 힘을 다해 싸움)에 분전을 거듭했다. 19일 동안의 격전 끝에 15연대 장병이 고지를 탈환했을 때의 참상은 필설로 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다. 우리의 병력은 끊임없이 이 고지를 향해 치달았고, 적들도 이 고지를 사수하기 위해 벌떼같이 달려들었다.



이우근 학도병. 1950년 8월 포항여중(현포항여고 자리) 앞 전투에서 전사. 포항시 용흥동 탑산에는 그의 편지비가 세워졌다.
부대원들이 고지에 올라섰을 때 아군과 적군의 시신들은 불에 검게 타거나, 갈기갈기 찢겨 나뭇가지 등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섭씨 37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운 날씨에 시신들의 배가 풍선같이 부풀어 올랐다가 터지는 소리에 등골이 오싹할 정도였다고 전우들은 증언했다. 제3중대 1소대 향도 정재중 일등중사는 공동묘지 모퉁이의 진지를 들여다봤을 때 실종된 것으로만 알았던 박로식 이등중사가 호 속에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박 중사” 하면서 손을 댔더니 이미 숨진 상태였다고 했다. 박 중사는 기관총 손잡이를 잔뜩 움켜쥔 채 앞을 노려보고 있었다고 했다.



15연대는 이곳에서 적군과 고지를 열 번 뺏기고 열 번 되찾는 참혹한 쟁탈전을 벌여야 했다. 특히 학병으로 이뤄진 특공대를 조직해 적이 점령한 고지의 후면으로 돌아가 공격을 해서 성공시킨 전과는 대단했다. 아군의 피해가 큰 만큼 적의 피해도 엄청났다. 적은 개전 초 서울을 먼저 점령해 김일성으로부터 ‘서울사단’이라는 호칭을 얻은 3사단이었다. 그들은 그러나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 1사단 15연대의 투혼(鬪魂)으로 발을 멈춰야 했다. 그리고 참혹한 병력 손실이라는 대가도 받아들여야 했다. 당시 적의 무전 감청을 통해 엿들은 얘기로는 적 1개 연대 병력 중 살아남은 사람은 270명에 불과했다. 90% 이상의 병력을 잃었던 것이다.



방어 전면의 우익(右翼)을 담당했던 우리 11연대도 분전하고 있었다. 가산산성에서 대구 쪽으로 공격을 해 오던 적은 11연대의 피땀 어린 항전으로 역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곳에서도 참혹한 혈투가 벌어졌던 것이다. 내가 사단 CP를 떠나 11연대 전선을 둘러볼 때에 주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하소연을 했다. 산과 계곡에 쌓인 적군과 아군의 시체 때문에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시체들을 빨리 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말 그랬다. 전선 곳곳에서 피비린내와 함께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고지를 점령한 아군은 참호 속에 가득 들어 있는 아군의 시체를 신원 확인 없이 그대로 묻고 또 묻어야 했다. 어느 땅, 어느 하늘 아래에서 살던 동료였는지 살펴 볼 경황조차 없었던 것이다. 학도병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아주 짧은 훈련을 받은 뒤 전선으로 올라갔다. 참혹한 전쟁의 현장을 보면서 이들은 겁을 먹었다. 분대장의 지휘를 받아 참호로 들어가 공격을 준비하다가 소변을 보러 분대장이 참호 밖으로 나가면 어찌할 줄을 몰라서 따라나가던 나이 어린 병사들이었다. 나는 사단장으로서 그들을 현장에서 지켜볼 기회는 없었다. 순수한 감성에 젖어 있던 나이 어린 학도병들은 그 현장에서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당시 전우들의 증언을 모은 『다부동 구국전투사』라는 책이 있다. 학도병의 수첩을 정리한 글이 들어 있다. 이우근(李佑根) 학도병이 어머니에게 쓴, 그러나 부치지 못한 편지의 일부를 이 글의 앞에 옮겼다. 서울 동성중 3학년 재학 중 학도병으로 참전한 그는 다부동에서 한창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1950년 8월 11일 포항여자중학교 앞 벌판에서 숨을 거뒀다. 이날 전투에서 제3사단 학도의용군 71명 중 그를 포함해 48명이 전사했다.



백선엽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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