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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붓이 스치면 꽃이 웃고 물고기가 숨쉰다

‘아, 생명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하악하악’.

작가 이외수(64)가 2008년 출간한 에세이집 『하악하악』 말미에 나오는 문구다. 이 책이 내뿜는 강인한 생명력은 그의 거침없는 필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삽화에 나오는 점몰개·꺽정이·버들붕어 같은 민물고기 60여 종과 여기서 비롯된 여백들이 글발과 어울려 힘을 더한다. 『여자도 여자를 모른다』로 시작해 『하악하악』 『청춘불패』까지 이외수의 저작 세 권을 함께 만든 세밀화(細密畵)의 대가 정태련(49·사진) 화백을 최근 강원도 춘천 자택에서 만났다. 이외수씨와 공동 작업한 네 번째 서적의 출간을 5월께 앞뒀다.

정 화백은 서울대 서양화과를 나와 20년 넘게 700여 점의 세밀화를 그렸다. “뜬구름 잡는 그림 말고 촌로라도 재밌어 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는 설명이다. “같은 사물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모습과 느낌이 달라진다. 세월의 한쪽을 기록한다는 일종의 사명감도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이런 ‘사명’을 다하기 위해 그는 1994년 대학 같은 과 동기동창이자 동화작가인 부인과 춘천으로 이사했다. “자연 가까이서 ‘오브제(그림 그릴 대상)’를 찾기 쉬운 곳”이라고 했다. 낡은 목재 단독주택에 안방과 작업실·거실이 전부다. 살림살이는 단출했지만 나무가 풍성한 마당만큼은 넉넉했다.

정 화백은 한 달에 열흘 정도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온다. 일상에서 오브제를 우연히 발견하는 행운도 가끔 누리지만, 작심하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지 않으면 좋은 소재를 찾기 힘들다. 주된 소재는 민물고기·야생화·새·낙엽·돌멩이 같은 자연물이다. “예뻐서”란다. 이 때문에 그는 환경운동 진영의 주목을 받기도 한다.

오브제를 찾으면 우선 사진부터 여러 장 찍는다. 현장에서 그때그때 받은 느낌과 빛의 방향에 따라 달라지는 색감을 기록해 두는 과정이다. 사물 본연의 모습과 느낌을 담아낼 때까지 적게는 수십 장에서 많게는 수백 장까지 찍는다. 그 때문에 그가 사는 동네 사진관에서 큰 고객이다. “하루종일 그릴 대상을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에 가장 잘나온 사진 한 장을 선택해 출력해서 본다”고 했다.

이 정도 준비했다고 곧바로 붓을 들지는 않는다. 하루 이틀 대상을 면밀히 관찰하며 뜸을 들인다. 짧은 잎이 여럿 나 있는 낙엽송의 경우 잎의 개수를 일일이 세어 본다. 꽃을 그릴 때는 꽃봉오리에 나 있는 미세한 털 한 가닥까지도 담아낸다.

버들붕어
『하악하악』에 들어갈 민물고기를 그리는 작업은 2년이나 걸렸다. 국내에만 서식하는 민물고기를 찾아 전국을 누볐다. 희귀종인 꺽정이를 잡는 데에는 반년가량이 소요됐다. 잡은 물고기는 국립수산과학원 이완옥 박사에게 자문했다. 어떤 종인지, 지느러미 개수와 옆줄의 비늘 개수가 원래 그 종과 같은지 등을 과학적으로 확인했다. 정 화백은 “지느러미, 비늘 한두 개만 달라도 종이 바뀌는 셈”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그려낸 70여 종의 토종 민물고기 150점은 이런 산고를 거쳤다.

채색 또한 지난한 과정이다. 여러 번 덧칠해야 푸근하고 깊이 있는 색이 나온다. 보통 수채화를 그릴 때 쓰는 붓이 20호 정도지만 세밀화는 가장 작은 00호짜리 붓을 쓴다. 정 화백은 이마저도 반으로 숱을 쳐내 쓰고 있었다. 그의 창작도구는 허름하게 보일 정도다. 밑그림 그리는 샤프와 지우개, 채색에 필요한 수채물감과 팔레트, 손때로 길이 생긴 작은 붓 몇 개가 전부였다. 그림의 크기는 보통 가로·세로 모두 10~20cm로 엽서 크기만 하다. 더욱 줄여 요즘은 10cm를 넘기지 않으려고 애쓴다. “화폭을 줄이면 좀 더 작고 정교하게 그리려고 애쓰게 된다”고 했다.

소품이라도 하나 그리려면 닷새~1주일이 꼬박 걸린다. 엄청난 끈기와 집중력이 세밀화 작가들에겐 필수 덕목이다. 정 화백은 하루 10시간 이상을 책상에 붙어 있다. 부인 박경진(48)씨는 “매일 도 닦는 사람하고 같이 산다”며 웃었다.

정태련 화백이 강원도 춘천시 자택 작업실에서 세밀화를 그리고 있다. 평범한 낙엽이 정성과 감정이 담긴 그림으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작업을 위해 찍어 둔 사진들을 펼쳤더니 방 한 칸이 가득 찼다. [오종택 기자]
세밀화는 사진처럼 실물과 똑같은 형상을 옮겨 찬탄을 자아내는 것이 목표가 될 수 없다. 사물에 대한 애정과 감정이입을 통해 실물 이상의 감동을 자아낸다. 그는 “주변의 흔하디흔한 것들이 ‘끔찍이 좋구나’ 하는 마음이 우러나오지 않으면 이보다 끔찍한 고문이 따로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랑스러운 자연에 대한 고마움을 일기 쓰듯 표현하려고 한다”고 했다.

그의 작업실에선 에릭 사티의 연주곡 ‘짐 노페디’가 흘러 나왔다. 책상 위에 깃털 하나와 낙엽송 한 잎이 눈에 띄었다. 지난해 12월부터 이곳에 나란히 올라와 있다고 한다. 고양이들에게 뜯겨 땅에 떨어진 새의 깃털 하나, 땅 위에 안착하려고 빙빙 돌며 떨어진 낙엽송 한 잎은 휜 모습이나 길이가 공교롭게 닮았다. ‘시간’ ‘세월’을 형상화할 수 없을까 고민하던 터에 이 둘을 발견해 한 화폭에 나란히 담았다.

글=춘천=박유미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이외수가 보는 정태련 그림
“글을 꾸미는 삽화가 아니라 그 자체로 표정 있는 작품”


정태련 화백은 1980년대 초반 대학 시절 서울 신촌 이화여대 인근 6층 옥탑방에서 화실을 운영했다. 어느 날 가르치던 미술대 입시생이 돌아가고 혼자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화실 문을 똑똑 두드렸다. 새벽 2시쯤이었다.

문 밖에는 남루한 행색의 취객이 서 있었다. 술냄새를 풀풀 풍기며 “삶이 힘들고 고달픈데 이 시간에 깨어 있는 화가가 하나라도 있겠지 하고 그냥 와봤다. 당신 그림을 보고 싶다”고 했다. 당시 이대 앞에는 화실이 많이 몰려 있었고, 이 건물도 화실촌에 위치했다. 이 불의의 방문객이 훗날 ‘기인 소설가’로 이름을 떨친 이외수였다.

이외수씨의 회상. “화가 지망생이었다가 소설로 전향해 글을 쓰고 있었다. ‘겨울나기’라는 글을 출판사에 써주고 받은 원고료로 화실을 운영하는 친구들에게 술하고 밥 사준 뒤 자살할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이외수를 살리면서 둘의 인연은 시작됐다. 적잖은 나이 차이에도 금세 ‘호형호제’ 사이가 됐다. 작업을 함께한 건 훨씬 뒤의 일이다. 첫 공동작품인 『여자도 여자를 모른다』는 2007년 출간됐다. 소설가 이외수가 정 화백과 함께 만든 책에서 세밀화는 삽화가 아니라 글과 동등한 대접을 받는다. 말하자면 문집과 화집을 책 하나로 엮은 것이다. 인세 수입도 반반으로 나눈다. 화가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 그의 이력과도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이외수가 보는 세밀화의 매력은 무얼까.

-저서에 세밀화를 넣는 의도는.

“『여자도 여자를 모른다』는 에세이집을 계기로 새로운 실험을 해봤다. 그림이 단순히 책에서 내용을 설명하고 보완하는 부수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감상할 독자적 위상을 갖도록 했다. 실제로 글의 내용과 그림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대신 어떤 관계가 있는지 따져보는 걸 독자의 몫으로 돌렸다. 상상력이 풍부한 독자라면 많은 관계를 만들어내고 느낄 것이다. 독자의 몫을 늘리고자 했다.”

-세밀화의 매력은.

“정 화백의 세밀화는 사물 자체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건 물론이고 거기에 감성이 듬뿍 담겼다. 꽃 한 송이, 물고기 한 마리에 다 특징과 표정이 살아 있다. 각기 다른 감성을 간직한다.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통용될 만한 감성과 내용을 머금었다. 사물과 얼마나 똑 닮았는지가 아니라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읽어내야 한다.”

박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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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