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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남긴 숱한 명곡, 흥얼댈 줄 모르는 한국인 있을까요

1960∼70년대 한국 가요계를 이끌었던 원로 작곡가 박춘석씨가 14일 오전 6시 자택에서 별세했다. 80세. 16년간의 힘겨운 투병을 뒤로 하고 조용히 숨을 거뒀다.

한국 현대 가요사는 박씨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1950년대부터 지난 40여 년 불후의 히트곡으로 한국인의 마음을 적셔온 고인은 국내 대중음악계의 거목이었다. 고인은 무엇보다 폭 넓은 음악을 빚어냈다. 서구의 영향을 받은 팝발라드부터 토속적 가요, 트로트에 이르기까지 무려 2700여 곡을 발표했다. 국내 작곡가 중 최다 작곡 기록이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도 개인 최다곡인 1152곡이 등록돼 있다. 전성기인 60~70년대에는 패티김·이미자·남진·나훈아·문주란·정훈희·하춘화 등 ‘박춘석 사단’을 이끌었다. 이들과 함께 ‘가슴 아프게’‘공항의 이별’‘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물레방아 도는데’‘사랑이 메아리 칠 때’‘마포종점’‘초우’‘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섬마을 선생님’ 등 한국인의 가슴을 적신 숱한 명곡을 쏟아냈다. 그의 노래를 한두 곡 모르는 중·장년층이 없을 정도다. 이미자에게 ‘엘레지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을 안겨준 이도, 패티 김을 발탁해 스타덤에 올린 이도, 바로 그였다. 한국적 화성과 애조 띤 정서로, 만드는 곡마다 족족 히트시키킨 ‘ 미다스의 손’이자, 고 길옥윤과 함께 국내 대중음악의 기틀을 만든 쌍두마차였다. KBS 방송가요대상, MBC 10대 가요제 특별상, 제1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1994), 옥관문화훈장(1995) 등을 수상했다.

고인은 193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환경 덕에 어려서부터 풍금과 피아노 연주를 익혔다. 경기중 4학년(고교 1학년)때 길옥윤 등과 함께 명동 ‘황금클럽’ 에서 피아노 연주를 한 것이 공식 데뷔이다. 당시에는 피아노가 많지 않아 연주할 때마다 트럭에 피아노를 싣고 다녔는데, 박씨도 자기 집에 있는 피아노를 가져와 연주했다. 49년 서울대 음대 기악과(피아노 전공)에 입학해 1년 만에 중퇴한 이듬해인 50년 신흥대학(현 경희대) 영문과에 편입, 졸업했다.

이후 박춘석 악단을 결성한 그는 은성살롱과 미군부대에서 연주했다. 검은 뿔테 안경, 독특한 헤어 스타일도 이때 시작됐다. 처음 작곡한 곡은 첫사랑으로 알려진 백일희가 부른 ‘황혼의 엘레지’(1954). 그러나 실연 후 박씨는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과 결혼했다”며 평생 독신을 고수했다.

박씨는 미 8군 쇼의 스타였던 패티 김에게 독집 데뷔음반을 작곡해주면서 인기를 안겨주었다. 패티 김은 2008년 본지에 연재된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미 8군 쇼무대로 직접 나를 찾아온 박춘석 선생이 큰 가수가 될 것이라고 칭찬해줬다. 가수 패티 김을 만든 가장 결정적인 운명은 박춘석 선생과의 만남”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이후에도 지방공연 중 하룻밤 사이에 만든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등 시대를 초월해 사랑 받는 패티김표 팝발라드를 만들어냈다.

주로 팝 싱어들과 호흡을 맞추던 그의 음악세계에 큰 변화가 온 것은 64년 이미자와의 만남이다. 스스로 ‘음악인생 2기’라고 말하는, 트로트 황금시대를 열었다. ‘섬마을 선생님’‘기러기아빠’‘’흑산도 아가씨’‘황혼의 블루스’‘삼백리 한려수도’ 등 500여 곡을 작곡하면서 황금콤비로 활동했다. 꺾기 창법, 구슬픈 멜로디 등 대중 정서에 밀착한 한국형 전통가요 ‘트로트’의 완성이다.

국내 연예기자 1호인 정홍택 한국저작권단체연합회 이사장은 지난해 일간지 기고문에서 “60~70년대 박씨가 살던 충무로 3가의 집은 근대 대중가요의 산실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유명 가수, 작사·작곡가, PD와 기자들이 고인의 집에 몰려들었다. “박춘석은 2층에 있는 작은 방에서 작곡하고 아래층은 항상 손님들 차지였다. 담배를 지나치게 피워, 피아노 건반은 담배 불로 타있고 악보를 태우기 일쑤였다”고 돌아봤다.

고인은 78년 일본 엔카의 여왕 미소라 히바리에게 외국 작곡가로는 처음 곡을 주기도 했다. 89년 이미자 데뷔 30주년 음반수록곡 ‘노래는 나의 인생’을 작곡하면서 왕성한 창작열을 과시하던 그는 94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고인의 말년은 쓸쓸했다. 투병생활 중 거동은 물론 의사표현도 힘들어했다. 간병은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인 동생 박금석(77)씨가 맡아왔다.

가요연구가 박성서씨는 “투병 중에도 ‘열린음악회’ ‘가요무대’같은 프로그램을 빼놓지 않았는데, 패티김·이미자· 남진이 나오거나 본인이 작곡한 곡이 나올 때면 종종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고 전했다.

빈소는 서울 풍납동 아산병원.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지며 발인은 18일 오전 8시다.

양성희 기자


박춘석이 걸어온 길

1930년 서울 출생

1947년 경기고 졸

1949년 서울대 음대 기악과 중퇴

1954년 신흥대(현 경희대) 영문과 졸

1954년 KBS경음악 단장

1955~64년 오아시스레코드사 전속 작곡가

1965~75년 지구레코드사 전속 작곡가

1987년 음악저작권 협의회 회장

1989년 거성레코드사 회장

1990년 세계법보사 회장

1992년 가칭 통일국민당 창당 발기인

2010년 3월 14일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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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