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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끝에서 나온 사리들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또 한 분의 영적 스승이 우리 곁을 떠났다. 지난해 2월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善終)하고 1년여 만이다. 명동거리를 감돌아 꼬박 4시간 반을 줄 서서 조문했던 일이 어제 일처럼 새뜻하다. 학창 시절 송광사에서 보살계를 받은 이래 몇 차례 법정 스님을 친견했지만 정작 영전에는 조문하지 못했다. 길상사에도 송광사에도 가지 못했다. 그런데 조금도 죄스럽거나 섭섭하지가 않다. 알 수 없는 평정심이다. 스님은 떠난 것이 아니라 그저 옷을 벗었다는 느낌이다.

서가에서 범우사 문고판 『무소유』를 꺼내보았다. 1976년 문고판으로 나온 이래 총 340만 부가 나갔다. 하지만 저자인 법정 스님은 “내 책 절판하고, 사리를 찾으려 말며, 탑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스님은 삶 자체가 선(禪)이었습니다. 말과 글과 행동이 하나가 되게 하려고 노력하셨지요. 선학과 교학의 경계를 넘어선 그분은 말씀 한마디로 세상을 바꾸고 정화하는 법력이 있었습니다. 그분과 동시대를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축복입니다.”

동국대 불교대학 교수 보광 스님(59)은 법정 스님이야말로 당대의 선승이었다고 평했다. 참선의 진정한 의미는 선방에서 몇 년을 났느냐가 아니라 수행과 포덕으로 얼마나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했느냐에 있다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진리를 진여(眞如)라고 한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언어를 떠난 이언진여(離言眞如)와 언어에 의존한 의언진여(依言眞如)로 나누고 있다. 선종과 교종의 가름인 셈이다. 한국불교는 선·교를 아울러 수행하는 회통(會統)의 전통을 지녔다. 대중 선방 대신 정갈한 토굴생활을 택한 법정스님 또한 선·교의 회통을 수행의 근본으로 삼았다. 스님의 화두는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였고 청량한 법문은 『무소유』같은 명저로 남았다. 이제 스님은 남은 ‘가죽주머니’마저 다비하고 사대(4大:흙·물·불·바람)로 돌아갔다. 다비식 후에 사리를 못 찾게 했지만 그의 명저는 이미 사리가 되었다. 붓끝에서 나온 사리들이다.

김종록 객원기자·작가 kimkisan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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