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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의 고향은 뉴기니, 이슬람 거쳐 유럽으로

인도 심바올리슈거의 직원들이 설탕 포대를 옮기고 있다. 인도는 브라질에 이어 세계 2위의 설탕 생산국이다. 지난해 심각한 가뭄으로 사탕수수 생산이 급감하면서 설탕값이 크게 올랐다. [블룸버그]
설탕은 식물의 자당으로 만든다. 이산화탄소와 물이 있으면 엽록식물이 광합성을 통해 자당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설탕으로 가공하는 데 경제성 있는 식물은 현재 사탕수수와 사탕무 정도다. 사탕무로부터 설탕을 얻는 것이 19세기에나 가능해진 점을 감안하면 설탕의 역사는 사탕수수 재배의 역사와 거의 일치한다.유럽인들이 설탕의 존재를 처음 접한 것은 기원전 4세기께다. 알렉산더 대왕 휘하인 네아르쿠스 장군은 기원전 327년 인더스강 근처를 항해한 뒤 “인도에서 자라는 갈대는 벌의 도움 없이도 꿀을 만들어낸다. 인도인들은 그 즙으로 음료수를 만든다”고 말했다. 사탕수수로부터 설탕을 만드는 과정은 일견 단순하다. 수확한 사탕수수를 분쇄해 설탕즙을 짜낸 다음, 이 즙을 졸이고 증류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가 흔히 보는 결정 형태의 설탕을 얻는다. 그런데 이런 과정엔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하다. 이집트에는 사탕수수를 심어서 베기까지 28차례에 걸쳐 물을 대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 사탕수수는 땅을 황폐하게 하는 성질이 있어 재배 지역을 자주 옮겨야 한다. 이런 제약 때문에 중세까지 설탕은 왕족이나 귀족만이 접할 수 있는 귀한 식재료였다.

일반인들이 설탕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16세기 이후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노예라는 값싼 노동력과 신대륙의 식민지라는 광활한 땅을 활용해 대규모 플랜테이션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가와기타 미노루 오사카대 교수는 '설탕의 세계사'라는 책을 통해 “설탕은 면직물·커피와 함께 노예무역을 낳은 세계상품”이라고 규정했다. 세계상품은 세계 어디서나 쓰이는 주요 상품을 말한다. 근대의 설탕·면직물, 현대의 석유·TV·자동차 등이 그 예다.

이슬람
그리스·로마 시절 인도에서 생산된 설탕은 캐러밴을 통해 아랍으로 전해졌다. 유럽이나 그 밖의 지역으로 널리 퍼진 것은 이슬람의 공이다. 7세기 아라비아 반도에서 시작된 이슬람은 동쪽으로는 인도·인도네시아를 거쳐 나중에는 중국의 일부 지역까지 전해졌다. 서쪽으로는 터키와 북아프리카로 퍼져 나갔다. 특히 8세기에는 스페인에 이슬람 왕국이 들어서며 유럽에도 본격적으로 설탕이 상륙했다. 설탕이 칼로리를 보급하는 식량으로 쓰인 것은 겨우 200년밖에 안 됐다. 그 전에는 약품·향신료·장식재료·방부제 등의 역할을 했다. 특히 이슬람 의학에서 설탕은 흔히 쓰이는 약재였다. 11세기 아라비아의 의학자 이븐 시나는 “설탕은 만병통치약”이라고 단언했다. 비잔틴 제국의 마누엘 콘메누스 황제의 어의였던 시네시오스는 열을 내리기 위해 장미설탕을 처방했다고 한다.

설탕은 또 후추와 마찬가지로 고급 조미료였다. 정교하게 세공된 모습으로 왕이나 귀족이 참석하는 자리를 장식하기도 했다. 이런 설탕 장식이 오늘날 웨딩케이크의 기원이 됐다.설탕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 중세 유럽으로 널리 전파됐다. 존스홉킨스대학 시드니 민츠 교수(인류학과)는 '설탕과 권력'에서 “영국의 헨리3세는 1226년 윈체스터 시장에게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산 설탕 3파운드(1.4㎏)를 구해 달라고 요구했다는 기록이 있다”며 “에드워드1세 재위 시절인 1288년에는 왕실의 설탕 소비가 6258파운드(2800㎏)에 이를 정도로 소비가 급증했다”고 적었다. 이집트의 술탄은 1040년 라마단 기간에 7만3300㎏의 설탕을 썼다. 설탕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설탕혁명
사탕수수의 전파는 대항해 시대의 개막과 궤를 같이한다. 지중해에서 대서양 연안의 마데이라 제도, 카나리아 제도 등으로 이동한 사탕수수는 1493년 콜럼버스의 두 번째 항해를 통해 카리브의 산토도밍고로 옮겨졌다. 이어 멕시코·브라질 등 신대륙에도 상륙했다. 감자·옥수수·토마토·담배 등이 신대륙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것과는 반대의 길을 걸은 것이다. 16세기 이후 남미에서 생산되는 브라질당이 유럽으로 수입되면서 설탕 소비는 대폭 늘었다.지중해에서부터 사탕수수 재배에 노예의 노동력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신대륙으로 경작지가 바뀌면서 이런 경향은 더 심해졌다. 쿠바·자메이카를 비롯한 카리브해의 섬에는 노예의 강제노동을 기반으로 한 대규모 농장인 플랜테이션이 잇따라 들어섰다. 무인도에 가깝던 섬이라도 일단 사탕수수 농장이 개발되면 몇 년 안에 수만 명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로 채워졌다. 노예들에 의해 쿠바 음악과 부두교로 대표되는 카리브해 문화가 성립됐다. 역사가들은 이를 ‘설탕혁명’이라고 부른다.

신대륙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은 근대의 삼각무역을 낳았다. 한 번 항해에 2~3개월이 걸렸는데, 성공하면 투자금의 두 배가 넘는 배당을 받을 수 있었다. 포르투갈에 이어 스페인·네덜란드·영국·프랑스 등이 대서양의 패권을 장악하고 삼각무역에 뛰어들었다. 이런 상황은 19세기까지 이어졌다. 영국의 리버풀과 더불어 대표적인 무역의 중심지였던 프랑스 낭트의 상공회의소에서는 “기니무역(노예무역)만큼 귀중하며 국가가 보호해야 할 무역은 없다”고 결의했을 정도다. 영국 역사학자 노엘 디어는 “2000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노예무역에 희생된 책임은 설탕에 있다”고 썼다.
 
설탕전쟁
플랜테이션을 통해 공급된 값싼 설탕은 영국 산업혁명의 밑거름이 됐다. 설탕을 듬뿍 탄 홍차와 귀리에 우유와 설탕을 섞은 죽이 가난한 도시 노동자의 아침식사가 된 것이다. 오후에도 홍차와 설탕과자를 함께 먹는 티브레이크 관습이 생겼다. 영국인들은 전체 칼로리의 15~20%를 설탕에서 얻었다. 신대륙의 사탕수수에 대항해 유럽 내륙에서 사탕무를 재배하면서 값싼 설탕의 지속적인 공급이 가능해졌다.이때부터 신대륙산 사탕수수와 유럽산 사탕무의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사탕무를 활용해 설탕을 만드는 기술은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독일은 식민지 경쟁에 뒤늦게 뛰어들어 플랜테이션을 운영할 수 없었다. 1799년 프로이센의 학자 에크하르트가 러시아·폴란드 국경 지역에서 재배하는 사탕무에서 설탕을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는 1806년 나폴레옹이 대륙봉쇄령을 내리면서 해외에서 설탕 수입이 끊기자 사탕무 재배를 장려했다. 1840년 전 세계 설탕 생산량의 5%가 사탕무에서 나왔다.

1880년대에는 사탕무가 사탕수수를 앞지르게 된다. 사탕무는 사탕수수보다 설탕 제조에 불리하다. 하지만 유럽 국가들은 산업혁명 이후 급발전한 과학기술을 도입해 이런 약점을 해결했다. 노예 노동력 대신 증기기관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정부도 보조금 지급 등을 통해 사탕무 설탕 생산을 장려했다.현재는 다시 사탕수수 설탕의 비중이 60% 정도까지 올라갔다. 이런 배경이 최근 설탕으로 인한 무역전쟁의 원인이 됐다. 지난해 인도의 가뭄과 사탕수수 보조금 중단으로 세계 설탕 공급의 13%가 줄었다. 영국의 트로픽스캐피털매니지먼트는 올 1분기에만 세계에서 500만~600만t의 설탕이 부족할 것으로 추산했다. 한국의 연간 소비량이 90만t 수준이다. 동남아에선 돈이 있어도 설탕을 못 살 지경이다.

이에 따라 올 들어 원당 가격이 파운드당 30센트에 육박해 1년 만에 두 배로 올랐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올 초에 설탕 수출을 50만t 늘리겠다고 밝혔다. EU는 설탕 농가에 보조금을 주는 대신 연간 수출량을 135만t으로 제한하기로 2006년 세계무역기구(WTO)와 합의했다. 보조금은 t당 400유로 수준으로 설탕 가격의 절반 수준에 육박한다. EU가 갑자기 쿼터를 늘리자 설탕 수출국인 브라질·호주·태국은 당장 “WTO 합의 위반”이라며 제소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설탕
설탕이 한국에 보급된 것은 20세기 초로 추정된다. 일본 강점기인 1920년 평양에 사탕무를 원료로 하는 제당공장이 처음 만들어졌다. 국내 기업으로는 제일제당(현 CJ제일제당)이 1953년 부산에 첫 설탕공장을 지었다. 해외 원조물자 중 하나이던 원당을 가공해 설탕을 만들었다. 하루 생산능력은 25t 정도로 “아침에 설탕 한 트럭을 싣고 나가면 오후에 한 트럭의 돈이 들어올 정도”라고 할 만큼 인기를 끌었다. 신세계 상업사박물관에 따르면 1960년대까지 인기 있는 명절 선물은 설탕·밀가루와 쌀·계란·돼지고기·참기름 등 농수산물이었다. 설탕은 특히 물자가 부족했던 이 시대에 최고의 선물로 꼽혔다. 손님이 찾아오면 설탕물을 대접하는 경우도 흔했다.경제가 발전하면서 국내 설탕 소비량도 크게 늘었다. 국제설탕협회(ISO)에 따르면 한국의 1인당 설탕 소비량은 2005년 기준으로 26㎏이다. 1인당 쌀 소비량(75㎏)의 3분의 1에 달한다. 대체로 설탕의 소비량은 국민소득에 비례한다. 선진국에서는 한 사람이 1년에 35㎏ 이상의 설탕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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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