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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지점에서의 만남, 불행의 서곡

1945 ~48년 미 군정 당시 이승만(사진 왼쪽)과 김구
1946년 2월 1일. 서울의 명동. 붉고 검은 벽돌로 지어 올린 명동성당, 당시는 ‘종현 천주교대강당’이라 불리던 예배당은 그때만 해도 언덕 높이 솟아올라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는 고고한 건물이었다. 지금은 숱한 고층빌딩들의 그림자에 가려졌지만···.
오늘은 이 명동성당이 시장판처럼 북적대고 있었다. 8·15 광복 이래 최대 규모라고도 할 수 있는 단체들의 대통합이 오늘 이 자리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정당·종교단체·문화인협회·부녀자회 등을 망라하는 61개 단체 중에는 상하이 임시정부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도 있었다. 그리고 임시정부 주석이던 김구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이끌어온 이승만도 실로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손을 맞잡았다.

“우리는 이제 이 자리에서 역사적인 비상국민회의 창립 선언을 하며….”
김구의 손을 놓지 않으며, 이승만이 벌떼처럼 몰려든 보도진에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 삼천만 대한 민족의 자주성을 무시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반대하며, 소위 신탁통치안을 결사 반대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김구 역시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결연한 의지를 목소리에 담으며 선포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백범, 참 감개무량하구료! 이제야 임자와 내가 힘을 합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나라의 앞날은 창창할 거외다!”

비상국민회의 창립 선포식을 끝내고 예배당을 가득 채웠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빠져나가는 동안 귀빈석에 앉아 있던 이승만이 옆자리의 김구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게요. 이 박사님이나 저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한결같은데, 왜 이제야 뭉치게 되었는지 안타까울 따름이올시다.”

김구가 웃으며 화답하자, 이승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전부터 내가 누누이 말했듯,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습네다! 이제부터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함께 가야 해요···. 그러자면, 먼저 이상한 소리들을 하고 있는 저 좌익 사람들하고 선을 분명히 그어야 할 것이오.”
“…좌익도 같은 겨레임은 틀림없으니, 최후까지 설득을 해야겠지요. 모두가 힘을 하나로 모아야만 작금의 위기를 타개하고 대한의 참다운 독립을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생각과 말은 여전히 조금씩 엇갈렸으나 해방 공간 최대의 거물이었던 두 사람은 언제 우리 사이에 대립이 있었느냐는 듯 서로 웃음을 던지고 귓속말을 나누며 단합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멀리 남산으로 저녁 해가 넘어가도록···.

이승만과 김구는 모두 황해도 출신으로 나이도 비슷했고, 오랫동안 독립운동을 해온 경력과 개인적인 카리스마도 비슷했지만, 일제강점기는 물론 광복 이후에도 한참 동안 서로 길이 달랐다. 이승만은 1875년에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고, 김구는 1876년에 해주에서 태어났다. 다만 이승만은 몰락 왕손의 후손이었던 반면 김구는 멀리 안동 김씨 가문의 후예라지만 몇 대 전부터 ‘상놈’으로 취급되던 집안에서 자란 것이 두 사람의 성장기에 어느 정도의 차이를 가져온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에 입학해 신식 학문을 배우다 개화파의 일원이 되었고, 김구는 서당에서 공부하다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한 후 동학운동에 가담했다. 국권을 빼앗길 즈음 이승만은 미국으로 건너가 학업과 외교 활동을 벌였으며, 김구는 국내에서 독립투쟁을 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고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두 사람은 모두 상하이로 건너갔다.

이로써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만났다”고는 볼 수 없었다. 김구는 경무국장으로 감찰과 첩보 활동을 일선에서 지휘한 반면 이승만은 총리, 그리고 대통령 직함을 갖고 주로 하와이와 워싱턴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1920년대 중반부터 김구가 임시정부의 중심적 역할을 맡기 시작했을 때 이승만은 그의 노선에 불만을 품은 의원들의 탄핵으로 임시정부와 결별해 버린다. 이후 광복까지 김구는 중국에서 무장투쟁을, 이승만은 미국에서 외교홍보활동을 지휘하며 따로따로 길을 갔다.

광복 후에도 각각 자신을 지지하는 단체를 이끌며 자리를 같이하지 않던 두 사람이 마침내 함께하게 된 것은 1945년 12월 말의 모스크바 3상회의가 계기였다. 여기서 “한반도에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고 알려지자 국민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고, 일치단결해 탁치 반대투쟁에 돌입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비상국민회의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투쟁은 사실 오해와 오도가 빚은 투쟁이었다. 3상회의의 결정은 신탁통치에 앞서 남북한 통일 임시정부를 수립하며, 탁치 기간 중 통치는 임시정부가 맡고 미국·소련·영국·중국 4개국은 후견 역할만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소 양국의 분할점령으로 갈라져 있던 남북한이 단일 정부 아래 합쳐지고, 주권은 한국민에게, 통치권은 임시정부에 귀속되므로 “제2의 식민지 지배”라는 인식은 사실과 크게 달랐다.

하지만 이승만과 김구는 그런 사실을 확인하고도 반탁 투쟁을 멈추지 않았는데, 개인적으로는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인임에도 국내에 기반 조직이 없고 임시정부의 정통성이 인정받지 못했기에 좌익보다 열세를 면치 못했던 상황을 역전시키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남로당이 3상회의 지지 입장을 보이고, 내막을 알게 된 인민당도 반탁 입장을 철회하는 등 좌익이 ‘매국노’ 같은 행동을 보였기에 이는 절호의 기회였다. 단 1년 만에 좌익이 우세했던 남한의 정치구도는 우익 우세로 뒤집혔으며, 미국과 소련의 공동위원회도 한국민의 거센 반발 때문에 표류하게 된다.

그리고 두 지도자의 최초의 협력관계도 동상이몽을 품고 있었다. 김구는 내친 김에 미국과 소련의 군정까지 몰아내고 임정을 바탕으로 통일정부를 세울 심산이었으나, 이승만은 미군정과 정면 충돌할 생각도 임정을 떠받들 생각도 없었다. 결국 1946년 6월 이승만은 전북 정읍에서 “미·소 공위가 결렬된다면 남한 단독 정부를 준비해야 한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김구는 이에 맹렬히 반대하며 이승만과의 공동전선에서 이탈했으며, 이후 이승만은 단정수립의 길로, 김구는 때늦은 좌우합작-단정반대의 길로 각각 떠나간다.

정치인이 자기 개인이나 소속 정파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라면, 지도자는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솔선하는 사람일 것이다. 광복 당시 세계는 한국인의 처지를 동정하면서도 스스로 안정과 발전을 추진할 능력이 있는지 의심했다. 그때 지도자로서 사람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던 사람이라면, 각자의 입장을 잊고 진정 나라를 위해 협력했어야 하리라. 하지만 불행히도 그들은 오랫동안 다른 길을 걸어오다 잘못된 지점에서 만났으며, 곧바로 다시 헤어졌다. 그리고 그 불행은 또 다른 역사적 불행의 서곡이 되었다.

※‘한국사를 움직인 만남’은 이번 회로 마칩니다. 그간 사랑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성균관대 정치학 박사로 현재 성균관대 부설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 『정약용 정치사상의 재조명』『왕의 투쟁』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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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