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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 다툼을 투기로 몬 임금, 참극의 씨를 뿌리다

왕비 윤씨를 상상해 그린 초상화. 성종과 세 명의 대비는 사직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그를 죽였지만 일반 백성들은 죄 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우승우(한국화가)
절반의 성공 성종⑥ 낮과 밤의 두 얼굴

성종은 수양대군의 쿠데타로 무너진 헌정 체제의 복원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재위 16년(1485) 『경국대전(經國大典)』 반포는 그런 노력의 결실이었다. 그러나 야사는 성종을 ‘낮에는 요순이지만 밤에는 걸주(晝堯舜 夜桀紂)’라고 묘사한다. 낮에는 요·순 임금처럼 선정을 베풀었지만 밤에는 걸·주 임금처럼 여성 편력에 빠졌다는 뜻이다. 성종은 4명의 왕후와 8명의 후궁 등 12명의 부인에게서 16명의 왕자와 12명의 공주·옹주를 낳았다. 만 열 살 때인 세조 13년(1467) 한명회의 딸(공혜왕후)과 혼인한 성종은 재위 4년(1473) 16세의 나이로 판봉상시사 윤기견(尹起<754E>)과 윤호(尹壕)의 딸을 동시에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이듬해 공혜왕후 한씨가 후사 없이 죽고 윤기견의 딸이 왕자(연산군)를 낳자 성종은 재위 7년(1476) 윤씨를 왕비로 책봉했다.

그러나 친정이 막강했던 한씨와는 달리 부친까지 사망한 한미한 가문 출신의 윤씨에게는 도전하는 후궁들이 많았다. 성종 8년(1477) 숙의(淑儀) 권씨 집에, ‘소용(昭容) 엄씨와 정씨가 왕비(윤씨)와 원자(元子: 연산군)를 해치려 한다’는 내용의 투서가 날아든 것도 애정 다툼의 일종이었다. 당시 대궐에는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 성종의 모친 인수대비 한씨, 예종비 안순왕후 한씨의 세 대비(大妃)가 있어서 삼전(三殿)이라고 불렀다.

왕비 윤씨의 방에서 독약의 일종인 비상(砒霜)과 굿하는 방법이 담긴 방양서(方禳書)를 발견한 성종은 투기의 증거라고 대비에게 보고했다. 정희왕후는 대신들을 모아 “세상에 오래 살게 되면 보지 못할 일이 없다” “투기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제후(諸侯)는 아홉 여자를 거느리는 것인데 지금은 그 수가 차지 않았다”라는 등의 말로 왕비를 비난했다. 그러면서 “중궁(中宮)이 이미 국모가 되었고 또 원자도 있는데 장차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성종실록』 8년 3월 29일)”라고 물었다.

회묘(懷墓)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무덤이다. 연산군이 회릉으로 추숭했다가 중종반정 이후 회묘로 강등됐다.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의료원 자리에 있었으나 1969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의 서삼릉 경내로 이장했다. 사진가 권태균
이것이 연산군 시절 큰 비극의 시작이었다. 아들에 불과한 신하들에게 어머니인 왕비의 죄를 의논하라는 무리한 요구였다. ‘좌우에서 서로 돌아보고 실색하여 말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라는 기록처럼 신하들은 크게 놀랐다. 정상적인 상황이면 ‘아녀자의 투기는 상정(常情)이니 잘 훈계하소서’ 정도로 덮어야 했다.

그러나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이 “주상의 뜻은 폐(廢)하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듯이 무리수가 두어졌다. 예조판서 허종(許琮)만이 ‘선갑이 3일, 후갑이 3일(先甲三日,後甲三日: 주역에 나오는 말로 일을 신중히 처리하라는 뜻)’이라는 신중론을 제기했을 뿐 정인지·정창손·심회 등의 대신들은 왕비의 친정 식구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종은 비상과 방양서 등을 바쳤다는 여종 삼월이를 사형에 처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으려 했으나 대신들이 강경 처벌을 주청해 장모 신씨의 작첩을 빼앗았다. 한미한 가문 출신의 왕비는 공신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겨우 왕비 자리를 보존했으나 성종의 총애를 잃고 대비의 미움을 산 왕비 윤씨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성종의 모친 인수대비 한씨가 가장 강경했다. 한씨는 성종 6년(1475) 편찬한 『내훈(內訓)』에서 “나는 일찍이 책을 읽다가 달기(<59B2>己: 은나라 주왕의 비)의 웃음과 포사(褒<59D2>: 주나라 유왕의 총희)의 아양이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책을 덮어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한씨는 『내훈』에서 남편에게 “오직 순종할 뿐 감히 거스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적었으나 일찍이 미망인이 된 한씨와 달리 왕비 윤씨는 호문(好文)만큼 호색(好色)이었던 성종의 여성 편력에 속을 썩었다.

야사는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냈다고 전하고 있으나 『성종실록』은 왕비가 성종이 총애하는 후궁의 방에 뛰어들었다가 뺨을 맞았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끝내 왕비를 폐출하기로 결심한 성종은 재위 10년(1479) 6월 2일 상당부원군 한명회, 영의정 정창손, 우의정 윤필상 등 정승들을 일찍 입궐시킨 후 왕비 문제를 거론했다.

성종은 “지금 중궁(中宮)의 행위는 길게 말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라면서 “내간(內間)에는 시첩(侍妾)의 방이 있는데 일전에 내가 마침 이 방에 갔는데 중궁이 아무 연고도 없이 들어왔으니, 어찌 이와 같이 하는 것이 마땅하겠는가?”라고 비난했다.
성종은 칠거지악(七去之惡)을 읊은 후 “이제 마땅히 폐하여 서인(庶人)을 만들려 하는데, 경들은 어떻게 여기는가?”라고 말했다. 큰 죄가 있는 것처럼 과장했지만 구체적 비난은 ‘투기’라는 것뿐이었다. 도승지 홍귀달(洪貴達)을 비롯한 승지들이 ‘원자(元子)를 낳았으니 폐하여 서인으로 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반대하자 이들을 모두 의금부에 투옥시킨 성종은 당일 왕비 폐출 교서를 반포했다. 이때 성종은 “내가 만약 후궁의 참소를 듣고 그릇되게 이러한 거조(擧措)를 한다면 천지와 조종(祖宗)이 위에서 밝게 질정(質正)해 줄 것”이라거나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사사로움이 있겠는가?”라는 등의 말을 반복했다. 후궁의 참소에 놀아난 결과가 아니라는 자기 변명이었다.

승지들이 대비에게 아뢰기를 청하자 ‘윤씨를 구제하려는 것’이라고 비난한 성종은 자신이 이미 두 번이나 아뢰었더니, 대비는 “내가 항상 화가 주상의 몸에 미칠까 두려웠는데 이제 이렇게 하니 내 마음이 안심된다”고 말했다고 전해주었다. 왕비 윤씨는 당일로 폐출되어 사가(私家)로 쫓겨났다.

그러나 이 조치에 대해 백성들의 민심은 부정적이었다. 성균관 유생들이 윤씨를 민가가 아닌 별궁으로 옮기라고 상소하자 “서생들은 국사에 관여하지 않는 법”이라며 옥에 가둔 사실에서 드러나듯 젊은 사림들도 윤씨를 동정했다. 성종 13년(1482) 8월 시독관(侍讀官) 권경우(權景祐)는 “국모가 되었던 분을 무람없이 여염(閭閻)에 살게 하니 일국의 신민이 마음 아프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라는 동정론을 펼쳤다. 대사헌 채수(蔡壽)는 “윤씨가 (옛날) 입궐한 후에 길거리의 아이들과 동네 아낙네들이, ‘윤씨가 매우 가난하여 스스로 반포(斑布: 무명)를 짜서 팔아가지고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이제 팔자가 좋아진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성종실록』 13년 8월 11일)”라고 윤씨에 대한 백성들의 동정을 전했다.

그러자 성종과 대비들은 되레 윤씨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인수대비는 정희왕후와 상의한 후 “우리들이 바른 말로 책망을 하면, 저는 손으로 턱을 고이고 성난 눈으로 노려보니, 우리들의 명색이 어버이인데도 이러하였다. 하물며 주상에게는 패역(悖逆)한 말까지 많이 했고, ····늘 ‘내가 오래 살게 되면 후일에 볼 만한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윤씨를 비난했다. ‘후일’은 아들이 왕이 되는 때를 뜻한다. 성종은 재위 13년(1482) 8월 주요 대신들을 불러 “윤씨가 흉험(凶險)하고 악역한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후일의 근심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라면서 ‘사직을 위한 대책’을 물었다. 아들이 왕이 되기 전에 죽이는 것이 사직을 위한 대책이었다.

정창손과 한명회는 “미리 예방하여 도모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고 좌익공신(佐翼功臣) 이계전(李季甸)의 아들인 동지사(同知事) 이파(李坡)는 “옛날 구익부인(鉤<5F0B>夫人)이 죄가 없는데도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죽인 것은 만세를 위한 계책이었습니다”라고 가세했다. 한나라 무제는 구익부인 조첩여(趙<5A55><59A4>)의 아들 유불릉(劉弗陵: 훗날의 소제)을 태자로 세우고 모친을 죽여버렸다. 여러 대신들은 “여러 의견들이 모두 옳게 여깁니다”라고 동의했다. 윤씨의 죄가 무엇인지 따지는 대신들은 없었다. 성종은 좌승지 이세좌(李世佐)를 보내 윤씨를 사사(賜死)시켰는데 그때 성종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사림들이 편찬한 『기묘록(己卯錄)』은 윤씨의 죽음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윤씨는 피눈물을 닦아서 얼룩진 수건을 어머니 신씨(申氏)에게 전하면서 ‘내 아이가 다행히 보전되거든 나의 슬프고 원통한 사연을 알려 주오…’라고 부탁했다.(『기묘록 보유』, 『이청전(李淸傳)』)”

야사에는 허종(許琮)이 지의금부사, 동생 허침(許琛)이 형방승지로서 이 임무를 맡아야 했는데 형제의 누이인 신영석(申永錫)의 부인 허씨가 훗날 큰 화를 입을 것이라며 입궐하다 다리에서 떨어지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두 형제는 다리에서 떨어져 훗날 화를 면했는데, 그후 종로구 사직동의 다리를 종침교(琮琛橋)라고 불렀다. 이세좌의 부인은 남편이 사약을 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슬프다, 우리 자손이 종자가 남지 않겠구나. 어머니가 죄도 없이 죽음을 당했으니 아들이 훗날에 어찌 원수를 갚지 않겠는가?”
어머니의 마음이 곧 예언이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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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