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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침략의 본거지 초토화한 미군의 도쿄 대공습

1945년 3월 10일 약 100만 발의 소이탄 소낙비가 내린 도쿄는 지상 30m까지 치솟는 불기둥의 해일 속에서 집과 자동차는 물론 사람들도 숯처럼 검게타 버렸다. 단 한 차례의 폭격으로 10만 명 이상이 숨지고 25만 동의 가옥이 파괴되었으며, 180만 명이 집을 잃는 참극이 벌어졌다.
1945년 3월 10일 새벽 B-29 폭격기 344대가 도쿄의 하늘을 뒤덮었다. 글리세린과 기름을 섞어 만든 소이탄 2400t이 3시간 동안 마치 융단을 짜듯 도시 전체에 퍼부어졌다. 불타오르는 건물과 숲은 사람들을 태워버렸고, 기름불로 끓어오른 강과 바다도 불길을 피해 뛰어든 이들을 삶아버렸다. “수많은 표류 시체를 보았다. 옷을 걸친 시체도 벌거숭이 시체도 모두 목탄처럼 검게 타있었다.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들이 사람의 시체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남녀를 분간할 수조차 없었고, 그 곁을 떠내려가는 물체가 팔인지 다리인지 아니면 불탄 나뭇조각인지도 식별할 수 없었다.” 도쿄 스미다 강 주변에 널린 희생자들의 참상을 목격한 한 군의관의 증언마냥, 도시 전체가 거대한 화장로(火葬爐)였던 그날 10만 명이 넘는 이들이 생명을 앗겼다.

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 이후 남태평양의 섬들을 차례로 잃어가면서도 일본의 위정자들은 국체호지(國體護持)를 외칠 뿐 국민의 안위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천황제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라도 지켜야 할 절대가치였다. “폐하의 신민(臣民)은 국체를 지키기 위해서는 옥쇄(玉碎)를 각오해야 한다.” 군부 강경파들은 결국 국민들을 전쟁의 불바다 속으로 몰아넣었다. 도쿄 대공습이 있기 한 달 전인 45년 2월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는 “패전이 분명하며 승리의 전망이 없는 전쟁은 하루라도 빨리 끝내야” 한다는 상주문을 올렸지만, 히로히토 천황은 “또 한번의 전과를 올린 다음이 아니면 상당히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며 전쟁을 계속하려 했다. 그때 천황은 침략전쟁의 주역이었다. 일본의 무모한 저항에 접한 미군은 군사시설만을 타격 대상으로 삼는 종래의 군사목표주의를 수정해 인구 밀집지역에 대한 무차별 폭격으로 맞섰다.

도쿄 대공습보다 한 달 앞선 독일 드레스덴 대공습은 나치의 항복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두 개의 원폭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를 잿더미로 만들 때까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원폭 피해만을 강조하며 자신들의 가해에 대해 눈감는 일본과 달리 드레스덴 공습이 “또 하나의 홀로코스트”라 주장하는 신나치의 망동에 “원인과 결과를 뒤바꿔 역사를 곡해하려는 어떤 시도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한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의 양식이 빛난다. 대공습 때 군수공장에 강제로 끌려 온 1만 명이 넘는 조선 사람들이 희생되었음을 일본은 물론 우리 정부와 시민사회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도쿄 대공습 65주년을 맞는 오늘. 그들의 희생은 우리 모두의 정수리에 국가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뼈아픈 일침으로 꽂힌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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