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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 됐더니 일 싸들고 퇴근하는 횟수 더 늘었어요”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어깨 넘은 긴 머리는 가지런히 묶었다. 단정한 차림새는 흡사 면접 보러 온 대학생 같다. 지난 2일 만난 일렉트로룩스코리아 정현주(35사진) 신임 대표다. 스웨덴에 본사를 둔 일렉트로룩스는 유럽 최대의 생활가전회사다. 미국 월풀에 이어 세계 2위다. 2008년 매출액은 159억 달러(약 18조원). 국내에서는 청소기와 커피메이커·토스터·블렌더·무선주전자 같은 소형 가전제품만 판매하지만 글로벌 시장에선 냉장고와 세탁기가 주력 상품이다. 정 대표는 지난달 초 마케팅팀장에서 법인 대표로 승진했다. 2002년 법인이 출범할 때 합류한 지 8년 만이다. 외국계 기업은 승진이 빠른 편이지만 서른 다섯에 사장에 오른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일렉트로룩스그룹 내에서도 파격적인 인사였다. 정 대표는 세계 70여 개 현지법인 대표 가운데 최연소 여성이다. 해외 유학파도 아닌, 순수 토종이라는 사실이 더욱 흥미롭다.

-서른 다섯에 이 자리를 예상했나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이때쯤은 다른 나라에서 일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글로벌 기업이다 보니 해외에서 근무할 기회가 종종 있는데, 그걸 희망했어요.”

-선임 배경은요.
“일렉트로룩스그룹은 공석이 생기면 인트라넷을 통해 공지하고 사내 지원자들의 신청을 받아요. 직원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기 위해 만든 공개인력시장(open labor market)이에요. 한국 대표 자리에 저, 그리고 미국에서 한 분이 지원했다고 해요. 본사 사장, 아시아·태평양 사장, 인사담당 사장 앞에서 면접을 봤어요. 한국 시장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장기적인 가능성을 가진 제가 회사 비전에 더 알맞다고 본 것
같습니다.”

-사장이 되고 연봉이 많이 뛰었나요.
“…(웃음). 성과에 따른 보너스 비중이 커졌어요. 일을 잘하면 보너스를 많이 받을 수 있는 거죠. 운전기사는 없지만 자동차는 나왔어요. e-메일과 전화량은 30~40% 늘었고, 일을 싸들고 퇴근하는 횟수는 더 많아졌습니다.”

-나이 많은 직원과 일하는 게 버겁지 않나요.
“처음에는 일하며 부딪히는 경우도 많았지만 차츰 상대방의 속도를 이해하고 맞춰주는 걸 배우게 됐어요. 젊은 직장 여성들이 흔히 저지르는 오류가 지나치게 결과 지향적이 되는 거예요. 남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강하게 밀어붙이면 상대방이 거부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부드럽지만 무르지 않은 리더십을 가지려고 해요.”

-성공 비결이 뭐라고 생각해요.
“묵묵히 열심히 일한 거요. 야심이 없진 않지만 그걸 드러내는 스타일은 아니거든요.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봐준 것 같아요.”
일렉트로룩스코리아는 주력 제품인 청소기를 국내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 8년 만에 시장점유율을 12%로 끌어올렸다. 외국 브랜드 중에서는 1위, 통틀어서는 삼성·LG에 이은 3위다. 지난해 한국법인 매출액은 300억원으로 청소기가 80%를 차지한다. 스웨덴 본사는 “삼성과 LG 같은 글로벌 가전업체의 본고장에서 선전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본사에서 한국 시장을 어떻게 보나요.
“한국 시장은 매우 중요한 곳이에요. 삼성·LG 같은 경쟁사의 홈그라운드이기도 하고, 소비자 수준이 높은 곳이어서 여기서 잘해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어요. 더구나 단기간에 빠른 속도로 성장해 더욱 주목했어요. 전년 대비 성장률이 40~50%씩 나와 2005~2007년 3년간 본사에서 상도 받았어요.”

-청소기가 성공한 요인은 뭔가요.
“국내 브랜드들이 성능, 흡입력을 앞세울 때 글로벌 브랜드들은 여과 능력을 중시했어요. 여과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광고와 기사를 결합한 ‘애드버토리얼’을 통해 스토리로 풀어냈죠. 제품을 써 본 고객들의 체험담도 실었어요. 체험 후기는 화장품에서는 쓰였지만 생활가전 분야에서는 시도하지 않았던 마케팅 기법이었어요. 고급스러운 스칸디나비안 디자인을 강조해 주부들이 갖고 싶어하는 ‘욕망 리스트’에 청소기를 올려놨죠.”

-좋은 상품이 주어진 거라면 수월했겠네요.
“외국에서 잘 팔린다고 한국에서도 무조건 잘되는 건 아니에요. 한국 시장의 특성을 파악해 들여올 종류와 사양을 결정합니다. 본사에는 없지만 한국 시장에 필요한 상품을 제안해 개발하기도 하고요. 소형 블렌더, 소형 주전자, 가습기는 한국의 요청으로 만들어졌어요. 한국 소비자들의 욕구를 신제품 개발에 반영하기도 해요.”

정 대표는 한영외고 일본어과와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학력 인플레’ 현상이 두드러지는 요즘 보기 드문 ‘학사 출신’이다. 94학번인 그가 졸업한 1999년 2월은 외환위기로 취업 시장이 꽁꽁 얼어붙었을 때다. 그 전해에 기업들이 채용을 안 해 누적된 취업 재수생까지 더해져 취업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런데 그는 덜컥 은행 공채에 합격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을 왜 나왔습니까.
“당시 사람을 뽑는 기업이 몇 없어서 그냥 은행에 지원했는데 운 좋게 붙었어요. 그런데 막상 일을 해보니 적성에 안 맞았어요. 활동적인 일을 하고 싶었는데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게 힘들었어요. 무엇보다 유니폼을 입는 게 싫었고요. 당시엔 드러나지 않는 남녀 차별이 꽤 있었어요. 6개월 만에 그만뒀죠. ‘나인 투 식스(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근무)’ 이상은 죽어도 못하겠더라고요.”

-‘나인 투 식스’만 잘해도 훌륭하지 않나요.
“해야할 일만 하면 발전이 없잖아요. 시키지 않은 일까지 찾아서 할 만큼 일이 재미있지 않았어요.”

-그 다음 직장은 어디였습니까.
“몇 달 놀다가 홍보대행사에 들어갔어요. 활동적인 일을 하고 싶었거든요. 회사 두 곳에서 3년간 일했습니다. 2002년 일렉트로룩스코리아가 출범할 때 마케팅 담당으로 자리를 옮겼어요.”

-요즘 취업 시장이 바늘구멍입니다. 구직자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직장 구하는 것보다 내가 진정 좋아하는 일이 뭔지를 찾는 게 우선이라고 봐요.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게 성공의 열쇠예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설사 조금 늦더라도 반드시 성공해요. 남의 눈을 의식하지 마세요. 남들이 좋은 직장이라고 말하는 건 의미가 없어요. 일이 재미있으면 능동적으로, 맡겨진 것보다 훨씬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러면 성공은 자연히 따라오죠. 잘 차려진 밥상만 기다릴 게 아니라 눈높이를 낮추더라도 경력을 쌓는 것도 중요해요. 시간을 좀 벌고 그 다음 단계를 생각해보세요.”

-영어는 어떻게 익혔나요.
“대학 4학년 때 8개월간 미국에서 어학연수를 한 게 유일한 해외 경험이에요. 귀국 후 취업 준비를 하면서 영어 공부를 시작했어요. 교재를 통째로 외우고 아침저녁으로 영어 방송 듣고, 시간 날 때마다 중얼거렸어요. 회사에 다니면서는 업무상 영어를 쓰면서 저절로 공부가 됐죠. 1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회사이다 보니 경영학 교과서보다 생생한 마케팅 자료들을 접할 수 있었어요.”

-CEO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조언은.
“진정으로 열심을 다해 현재에 충실하세요. 시키는 일만 하지 않고 일을 찾아서 하는 게 열심이에요. 그러다 보면 새로운 아이디어도 얻고, 결과물은 나아지게 마련이죠. 해야 할 일을 하고 ‘열심히 했다’고 말하는 걸로는 부족해요.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히는 노력을 하세요. 여성들은 디테일에 강하고 꼼꼼하지만 큰 그림을 그리고 사회 흐름을 보는 능력은 더 키워야 할 것 같아요.”


박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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