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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51) 숨가쁘게 넘긴 고비들

미군 1기병 사단장인 게이 장군(가운데)이 1950년 8월 대구 북방 다부동에서 격전을 치르고 있던 국군 1사단을 방문해 백선엽 사단장(왼쪽), 최영희 15연대장과 기념 촬영을 했다. 아래 사진은 6·25 당시 전쟁터를 누비고 다녔던 헤럴드 트리뷴 소속 전설의 종군기자 마거릿 히긴스. [다부동 구국 전투사·미 육군부 자료]
미국이나 연합국에서 온 종군기자들이 전선에 가끔 나타났다. 주요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을 나중에 방문해 꼼꼼히 취재하는 기자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국군이 새로 미군으로부터 건네받은 3.5인치 로켓포로 북한군 전차 넉 대를 잡은 것이 큰 뉴스였던 모양이다.

하기야 뉴스라면 뉴스였다. T-34 전차를 보기만 하면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는 국군이 적의 탱크를 보기 좋게 잡았으니 기자들로서는 구미가 당겼을 법하다. 기자들은 어쩌면 낙동강 전선에서 아군 측이 반격해 북진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이 로켓포와 T-34 전차의 대비에서 찾았을지 모른다.

이 소식을 듣고 유엔한국위원단 대표인 인도인 나얄 대령과 영국 더 타임스(미국의 뉴욕 타임스에 비겨 런던 타임스라고도 한다)의 아이언 모리슨 기자,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크리스토퍼 버클리 기자가 스리쿼터를 타고 현장을 찾아 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들은 현장에 접근하는 도중 대전차 지뢰가 터지는 바람에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일선 부대 후방에 그 부대의 뒤를 받쳐줄 예비 병력이 없거나 절대적으로 부족해 매 시각 전선 상황을 지켜보며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였다. 1사단 15연대 쪽이 불안해 보였다. 처음에는 미군이 지키던 왜관 쪽에 공세를 취하나 싶던 적이 우회를 해서 15연대 정면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 뒤로는 역시 예비 병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전면이 뚫리면 감당하기 어려운 결과를 낳는다. 한 곳이라도 적에게 돌파를 허용하면 전선(戰線)의 전면(全面)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전화선을 타고 급히 보고가 들어왔다. 15연대의 1개 대대가 맡고 있던 지역에서 적이 낙동강변의 328고지를 점령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럴 때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사단 CP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15연대 CP로 지프를 몰고 급히 달려갔다. 우선 연대장 최영희 대령을 찾았다.

“야, 최 대령 어디 있어, 지금 어떻게 된 거야?” 거의 고함을 치는 듯한 목소리로 내가 연대 CP에 들어섰다. 최 대령이 저 안쪽에서 엉거주춤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특기할 만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다. 종로에서 포목점을 하는 부친 밑에서 유복하게 자란 그는 항상 여유가 있었다. 사람 사이의 관계를 잘 조율하는 느긋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풍족한 환경에서 자라서 그런지 생활 자체를 즐기는 편이었다. 대표적인 게 전쟁 통에도 늘 병풍을 쳐놓고 ‘격조’를 유지하면서 식사를 하는 습관이었다. 그는 마침 늘 좋아했던 병풍 앞에 음식을 차려 놓고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도 막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숟가락을 급히 놓은 뒤 나와 함께 연대 CP 바깥으로 나왔다. 퇴각하는 부대원들이 보였다. 동남쪽의 소학산 쪽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큰일났다’라는 내 표정과는 달리, 최 대령은 조금 느긋한 얼굴이었다.

조금 있다가 느닷없이 후퇴하는 15연대 병력 앞으로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제 코앞에 떨어지는 포탄 때문에 부대원들은 더 이상 후퇴하지 못하고 있었다. 최 대령이 포병대에 지시해서 57㎜ 대전차포로 부대원들의 후퇴로(後退路) 앞에 포격을 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부대원들이 멈칫하는 사이에 최 대령은 재빠르게 앞으로 나서서 반격 명령을 내렸다.

그뿐이 아니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대대 병력의 아군이 나타났다. 새로 나타난 이 병력은 후퇴로에서 돌아선 부대원들과 함께 힘차게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떤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15연대 후방에는 준비해 놓은 예비 병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도대체 저 부대가 어떤 부대냐”고 물었다. 최 대령은 내 표정을 읽고서는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부터 했다. “사단장님, 죄송합니다. 연대 예비 병력이 너무 없어서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인사계를 대구에 보내 독자적으로 병사들을 모았습니다.” 인사 계통을 따라서 병력을 모집하지 않으면 규정위반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3대대를 사단 우익의 11연대에 보내면서 예비 병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자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니 최 대령을 탓할 수만은 없었다.

그 328고지는 다른 어느 전선과 마찬가지로 매우 중요했다. 뚫리면 만회가 쉽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15연대는 이틀간에 걸친 처절한 반격으로 328고지를 되찾았다. 그 소식을 듣고 내심으로 ‘얼마나 다행인가’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규정을 위반한 최 대령을 칭찬할 수도 없었다.

돌이켜 보면 최 대령의 여유가 남달랐다. 전쟁 통에 병풍을 치고 식사하는 여유, 후퇴하는 아군 앞에 포격을 해서 자칫 붕괴할 뻔한 상황을 만회하는 기지(機智), 남몰래 준비한 예비 병력…. 여유는 이를 누릴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만 어울리는 법이다. 이 길고 무더운 여름에 맞이한 전선의 위기는 그런 최영희 대령 덕분에 한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종군기자 히긴스=6·25전쟁을 취재한 숱한 외국 종군기자 중 가장 유명하다. 여성으로서 한국전쟁에 기자로 뛰어들어 현장 냄새 물씬 풍기는 기사로 전쟁의 참상을 세계에 알렸다. 1951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등 최고위 미군 지휘관들이 그의 단골 취재원이었다. 히긴스 외에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의 아들 랜돌프를 비롯한 많은 외국 종군기자가 전쟁의 포화 속을 누비고 다녔다.

백선엽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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