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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맹서 애증까지:고수석의 북·중 돋보기] ⑥ 장쩌민과 김정일





장쩌민과 김정일의 마지막편입니다.



장쩌민은 김정일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그 해답은 장쩌민의 집권 1기 (1992~1997년)에서 찾기 힘듭니다. 이 기간 동안 그의 정치적 입지는 견고하지 않았지요. 그는 1992년 10월 양상쿤(楊尙昆, 1907~1998)- 양바이빙(楊白冰, 1921~ )형제의 몰락, 1995년 그의 최대 정적인 베이징 서기 천시퉁(陳希同)의 숙청, 1997년 차오스(喬石, 1924~ )와 류화칭(劉華淸, 1916~ )의 퇴진 등 힘겨운 권력 투쟁을 통해 껄끄러운 존재들을 하나 둘씩 물러나게 했지요. 드디어 1997년 10월 중국 공산당 제15차 당대회를 통해 집권 2기 (1997~2002년)를 맞으면서 명실상부한 중국의 황제가 되었지요.



김정일에 대한 장쩌민의 생각은 한마디로 그의 16자 방침에 잘 나타나 있지요. 전통을 계승하고(繼承傳統), 미래를 향하며(面向未來), 선린우호(曉隣友好)속에, 협력을 강화한다(加强合作)이지요. 이것은 장쩌민이 2001년 9월 3~4일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에게 제시한 내용이지요. 한마디로 북한과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애매한 현상유지(Status quo)’ 를 하고 싶다는 뜻이었지요. 제1차 북핵 위기(1993~1994년)나 광명성 1호 발사(1998년 8월) 등 동북아 안보를 위협하는 상황이나 북한의 급변 사태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지요.



장쩌민은 1999년 6월 3~7일 베이징을 방문한 북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게 양국의 관계를 전통적 우호협력관계로 바꾸자고 전달했지요. 이는 덩샤오핑이 1978년 이후 사용하기를 꺼렸던 ‘혈맹’이라는 단어 대신에 양국 관계를 공식적으로 ‘전통적 우호협력’ 으로 정리하자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2001년 평양을 방문했을 때 그런 입장을 16자 방침에 담았지요.



장쩌민이 ‘혈맹’ 대신에 ‘전통적 우호협력’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중국은 자신의 실리에 따라 북한이 반대할 수 있는 결정도 하고 싶다는 것이지요. 특히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함에 따라 과거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요. 지금부터는 관념적인 관계에서 실제적인 관계로 발전하고 싶어서지요. 둘째는 무조건적인 대북 군사 지원이 아니라 ‘북한 남침은 불(不)지원, 한미 북침은 불(不) 좌시’의 입장을 나타냄으로써 북한의 남침과 한미의 북침 모두를 견제하고 싶었지요. 셋째는 북한 체제 붕괴는 중국에도 위협적이므로 경제적 지원은 그대로 유지하며 미국의 대북 제재는 반대한다는 것이었지요.



이처럼 장쩌민은 과거 선배들보다 더 북한과 거리를 두려고 했지요. 과거 선배들은 북한과의 고려 속에서 미국을 생각했다면, 장쩌민은 대미 관계에서 김정일을 생각했지요. 그는 중국의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했고, 반면 북한과는 적절한 거리를 두면서 관계를 유지해야 했지요. 과거 1972년 닉슨의 방중으로 미중 관계가 데탕트를 맞은 반면에 북중 관계가 불편해진 것과 마찬가지였지요.



장쩌민은 2002년 10월 북핵 위기가 다시 발발하자 대북 강경책으로 일관한 미국 부시 행정부와 보조를 맞추려고 했지요. 그는 2002년 11월 제16차 당대회를 통해 총서기 자리를 후진타오에게 물려주었지만, 2003년 3월 15일까지 국가주석으로 있는 동안 미국에 반대하는 다른 강대국들과 거리를 유지했지요. 장쩌민은 2003년 1월과 2월 부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북한의 대담하고 노골적인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2003년 1월 10일)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전달했지요.



장쩌민은 만약 김정일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면 두 가지를 걱정해야 했지요.

첫째는 일본의 핵무장 충동과 함께 미국이 타이완에 핵탄두를 배치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는 것이었지요. 둘째는 북한이 경제 제재로 붕괴하게 되면 중국은 사회주의 형제국가의 붕괴를 지켜보게 될 뿐 아니라 대규모 난민을 맞을 가능성도 두려워했지요. 그는 ‘애매한 현상유지’를 통해 두 가지의 극단적인 상황을 피하고자 했지요. 장쩌민은 북핵 문제를 접하면서 김정일과 가까이 하고 싶지 않지만, 아직은 그와 가까이 할 ‘필요’가 있었지요.



반면 김정일은 북한과 보다 미국과 더 가까워지고 싶어하는 장쩌민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김정일은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중국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덩샤오핑으로부터 직간접으로 여러 차례 들었고, 장쩌민과는 개인적인 친분도 없었기 때문에 북중 관계가 더 돈독해지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지요. 과거보다 더 실용적인 여건 속에서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관계로 변하리라 예상했지요. 자신보다 16살 많은 장쩌민과 좋은 관계 속에서 북한이 처한 경제난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북한의 경제성장을 기대할 뿐이었지요. 그래서 김정일은 2000년과 2001년 두 차례 중국을 방문하면서 베이징, 상하이 등에서 중국의 경제성장의 단면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지요. 그 결과로 북한에 2002년 7월 경제관리개선조치, 개성공단 본격화 등 새로운 실험을 시도했지요.



장쩌민과 김정일은 가슴보다 머리로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지요. 가슴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진한 공감대가 없었지요. 양국의 실리를 위해 겉으로는 웃었지만, 치열하게 두뇌 싸움을 했지요. 장쩌민은 김정일이 과감한 개혁을 도입해 경제 발전을 지속하고 중국의 든든한 지원자가 돼 주기를 기대했지요. 김정일도 조금씩 새로운 실험을 시도했지만, 중국식으로 과감하게 따라 가기에는 여전히 불안해 했지요.



장쩌민과 김정일. 두 사람은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양국의 지도자였지요. 그 과정에서 외교 관계도 새롭게 정리(혈맹→전통적 우호협력)하고 새 출발을 했지요. 결국 새로운 출발은 더 이상 중국과 북한을 혈맹이라고 부르지 않게 됐지요.



다음편은 후진타오와 김정일 편이 이어집니다.



☞고수석 기자는 중앙일보 사회부· 전국부를 거쳐 통일문화연구소에서 북한 관련 취재를 했다. 중앙일보 전략기획실 차장. 고려대에서 ‘북한· 중국 동맹의 변천과정과 위기의 동학’ 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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