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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한센병 환자 소록도 수용 … 죄도 없이 사실상 ‘무기수’ 생활

1947년 소록도갱생원에서 열린 환자와 자녀들 간의 면회식. 혹시 자녀가 감염될까봐 환자들은 멀찍이 떨어져 바람을 마주 대하고 섰다. ‘미감아’란 ‘아직은 감염되지 않은 아이’란 뜻이니 ‘미망인’만큼이나 심한 말이다. 소록도 환자들은 갱생원 직원들 앞에 설 때 바람을 맞는 자리에 서는 습관을 들여야 했다. 한센병 환자에 대한 강제 영구 격리가 중단된 것은 1954년 이후였다. [출처=『사진으로 보는 소록도 80년』]
질병과 부상은 크건 작건 사람의 몸에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다. 바이러스나 세균은 항체를 만들고 작은 찰과상도 흉터를 남긴다. 때로 두드러지는 표지를 남기기도 하는데, 두창은 얼굴에 ‘곰보 자국’을 새겼고, 소아마비는 평생 다리를 저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치료의 결과도 신체에 남는다. 맹장 수술 자국처럼 작은 것도 있고, 사지 절단 수술 ‘자국’처럼 큰 것도 있다. 어느 경우든 신체에 남은 흔적은 ‘질병의 결과’일 뿐 질병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한센병에 대해서만은 오랫동안 질병과 그 자취를 구분하지 않아 다 나은 사람도 박해와 격리의 대상이 되었으며,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지지도 않았다. 옛날부터 한센병 환자를 보는 시선이 공포와 적의(敵意)로 차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통 탈춤 중에 ‘문둥이’가 등장하는 것이 여럿 있는데, 이들 탈춤에 등장하는 ‘문둥이’의 춤사위는 ‘어린아이 간을 빼 먹는다’느니 ‘인육을 먹는다’느니 하는 행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1916년 2월 24일 조선총독부는 한센병 환자 수용시설을 갖춘 소록도 자혜의원을 설립했다. 이 땅에서 한센병 환자를 ‘위한’ 수용소를 먼저 세운 것은 미국인 선교사들이었는데, ‘문명의 수치’를 제거하는 사업을 선교사들에게 맡겨둘 수 없다고 판단한 총독부는 이때부터 한센병 환자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1934년 소록도 자혜의원이 한센병 환자만을 수용하는 소록도갱생원으로 개편되자 환자는 ‘죄수’가 되었다. 경찰은 환자를 ‘체포’해 소록도 갱생원으로 이송했고, 잡혀 온 사람들은 아무 죄도 없이 무기수(無期囚)가 되었다.



그런데 사실 ‘격리’란 수용자를 위한 조치가 아니다. 감옥이 죄 지은 사람이 아니라 죄 짓지 않은 사람에게 더 유용한 것처럼, 소록도갱생원도 한센병 환자가 아니라 한센병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시설이었다. 환자들이 멀리 떨어진 섬 안, 높은 담장 건너 편으로 사라지자 한센병에 대한 오해와 공포는 오히려 깊어졌다. 소록도갱생원이 생긴 지 이태 뒤 서정주는 ‘문둥이’라는 제목의 시를 발표했다. “해와 하늘빛이 / 문둥이는 서러워 / 보리밭에 달 뜨면 / 애기 하나 먹고 /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병에 걸리거나 다치지 않고 평생 사는 사람은 없다. 장애는 조금 두드러지는 질병과 부상의 흔적일 뿐이다. 보이는 곳에든 안 보이는 곳에든 누구에게나 그런 흔적은 있게 마련이니 장애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장애인 시설이 들어온다고 난리치고 장애인이 만든 빵은 사 먹지도 않는 비정한 세태를 더 지속시켜서는 안 된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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