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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의 시시각각] 심판이 없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는 직원 70여 명의 공공투자관리센터가 있다. 사업비 500억원, 국고 지원 300억원 이상인 사업의 예비 타당성 조사를 맡는 곳이다. 기획재정부는 그 덕분에 해마다 2조~3조원의 예산을 절감했다고 자랑한다. 1999년 이 제도가 생기기 전에는 사업 추진 부서가 자체적으로 타당성을 조사했다. 그 이전 5년간 전체 32건 중 단 1건만 불가 판정을 받았고, 그것도 울릉도에 공항을 만들겠다는 엉뚱한 사업이었다.



4조원의 공사비가 무색하게 승객이 예측치의 7%에 불과한 인천공항철도. 최근 도마에 오른 지방자치단체의 호화 청사. 이들 모두 예비 타당성 조사를 거치지 않았다는 게 공통점이다. 인천공항철도는 옛 철도청이 예비 타당성 조사가 법제화되기 불과 3달 전에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해 쏙 빠져나갔다. 지자체가 자체 재정으로 짓는 호화 청사는 아예 조사를 받을 의무가 없다. 사전 체크 없이 수천억원짜리 호화 청사들이 쑥쑥 올라가다 보니 뒤늦게 감사원이 부산을 떨고 있다.



예비 타당성 조사는 나랏돈 낭비를 막는 훌륭한 장치다. 조사 과정에서 절반가량의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사업들이 걸러진다. 기획재정부는 토목공사 중심의 조사 대상을 연구개발(R&D)·정보화·복지·보건 분야로 확대했다. 박수를 받아야 할 일이다.



예비 타당성 조사라는 좋은 제도도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 정작 큰 물고기는 잡지 못하는 것이다. 사업비가 20조원을 훌쩍 넘는 세종시와 4대 강 사업은 모두 이 그물을 피해갔다. 노무현 정부는 행정복합도시를 아예 특별법으로 추진해 예비 타당성 조사가 접근조차 못하게 막았다. 다른 선심성 사업들에도 꼼수가 동원됐다. “노 정부는 예비 타당성 조사를 피하려 전체 사업을 쪼개 각 사업비를 499억원으로 맞추는 마법을 자주 부렸다.” 국회 예산정책처 고위 관계자의 말이다.



이명박 정부는 지난해 3월 국가재정법의 시행령 자체를 아예 뜯어고쳤다. 재해예방 사업을 조사 면제 대상에 삽입한 것이다. 정부는 “4대 강 사업도 예비 타당성 조사를 받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생태하천이나 자전거 도로 사업은 그렇다. 하지만 준설, 제방 보강, 수중보와 같은 핵심 부분은 재해예방으로 분류돼 조사가 생략됐다. 정부는 한술 더 떠 ‘국가 정책적으로 추진이 필요한 사업으로서 기획재정부 장관이 정하는 사업’까지 면제 항목에 포함시켰다. 예비 타당성 조사가 무력화될 위기에 놓였다.



재정부는 새 시행령이 ‘대규모 사업은 예비 타당성 조사를 실시하여야 한다’는 국가재정법과 충돌하자 아예 모법(母法)까지 바꾸려 시도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다 지난해에는 예비 타당성 조사가 끝나지 않은 사업에도 예산안을 편성했다. 대부분 제2서해안고속도로, 새만금 신항 같은 굵직굵직한 사업들이다. 예비 타당성 조사가 누더기가 되면서 지자체들도 겁 없이 덤벼들고 있다. 인천시는 인천공항과 청라지구를 잇는 7㎞의 제3연륙교를 요구하고 있다. “연륙교가 없어 청라·영종지구 아파트 분양이 잘 안 됐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바로 위쪽의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가 통행량 부족으로 매년 1000억원대의 적자를 보고 있다. 바로 아래의 인천대교도 얼마 전 개통됐다. 여기에다 인천은 지난해 전국에서 아파트값 상승률 1위의 도시다.



예비 타당성 조사가 후퇴하면서 재정 건전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거대 공약 사업일수록 전문가들의 사전 심판 기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세종시도 그중 하나다. 6년 전 정부는 행정복합도시가 178조원의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똑같은 입으로 지난해에는 세종시를 수정해야 30조원 이상의 경제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영혼 없는 공무원들로 인해 국민은 헷갈릴 수밖에 없다.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외치면서 왜 6개월 남짓한 예비 타당성 조사는 기를 쓰고 피하려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심판은 없고 선수들만 어지럽게 뛰어다녀선 좋은 게임이 될 수 없다.



이철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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