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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하늘인 세상 열던 곳 식민지 시대 민족문화의 산실

<1> 붉은 벽돌로 지어진 천도교 중앙대교당. 1918년 12월에 착공해 1921년 2월에 준공됐다. <2> 월간지 ‘어린이’를 발간하는 등 어린이 행사를 처음으로 시작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 수운회관 마당 모퉁이에 있다. <3> 중앙대교당 내부는 기둥 없이 지어졌다. <4> 중앙대교당과 함께 지어진 천도교 중앙총부 건물. 수운회관 자리에 있던 이 건물은 1969년 서울 우이동 봉황각 옆으로 옮겨졌다. <5> 항일독립운동을 이끌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지어진 봉황각.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5명이 배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우이동 버스종점에서 도선사 입구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왼쪽에 있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호. 신동연 기자
서울 안국역 근처 운현궁 맞은편 천도교 수운회관. 앞뜰 동남쪽 모퉁이에 ‘세계 어린이운동 발상지’라는 기념비가 눈길을 끈다. 정문 왼쪽 문설주에 박힌 작은 동판이 ‘개벽사(開闢社)’ 터임을 알리고 있지만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대개는 무심코 지나친다. 『개벽』은 이상화의 저항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게재한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잡지다. 현진건·김동인·염상섭·김소월 등이 작품을 발표했던 민족 정론지(正論誌)는 통권 72호를 마지막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된다. 그 사이 무려 35회나 압수되고 수시로 삭제와 벌금 부과, 판매금지를 당한다.

사색이 머무는 공간<30> 서울 천도교 중앙대교당

수운회관을 오른쪽에 두고 안쪽으로 들어가 만나는 고풍스러운 붉은 벽돌 건물이 천도교 중앙대교당이다. 탑신 모양의 청동 지붕에 검푸른 녹이 내렸다. 준공 당시에는 명동성당·조선총독부 청사와 함께 서울을 대표하던 3대 건물이었다. 3·1 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자 동학을 천도교로 재편한 의암 손병희는 애초 조선총독부 청사보다 더 크고 위용 어린 교당을 짓고자 했지만 일제가 허가하지 않았다. 결국 지금의 규모로 축소해 지을 수밖에 없었다.

우이동 봉황각, 3·1 운동 주역들 탄생
건물 안팎의 박달나무 꽃과 무궁화 장식이 친근하다. 일본인이 설계했지만 민족혼을 되찾고자 한 손병희와 천도교도들의 의지가 담긴 표상이다. 교회당 내부는 기둥 하나 없는 장방형이다. 한국 민족종교의 대명사 천도교의 중앙대교당은 종교를 넘어 암울했던 식민지 시절에 민족문화를 낳은 산실이었다.

이 건물은 3·1 운동의 유산이다. 우리는 3·1 운동이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역사의 이면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1912년 6월 19일, 손병희는 서울 우이동 계곡에 봉황각(鳳凰閣)을 세웠다. 그 전 해에 의친왕 이강 공이 천도교에 입교하고 둘은 독립일꾼을 양성하자고 결의한다. 그곳에서 3년간 483명의 교역자를 배출한다. 3·1 운동 때 전국에서 이들이 주동자가 돼 미리 보급한 등사기로 독립선언서를 찍어내고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것이다.

조직력과 함께 자금이 필요했다. 손병희는 교회를 세운다는 명분으로 300만 신도들로부터 호당 10원씩 모금을 시작했다. 일제는 집요한 방해공작을 폈지만 500만원(현 시세로 약 2000억원)을 모았다. 그 가운데 대지와 건축비는 36만원이었다. 윤치호 소유의 대지 1500평이 3만원, 중앙대교당과 중앙총부(나중에 우이동 봉황각 앞으로 옮김) 건물 두 동의 건축비가 33만원이었다. 남은 돈이 3·1 운동 자금으로 쓰였음은 물론이다. 기독교 대표 측이 최린에게 자금 조달의 어려움을 말하자 손병희는 5000원을 쾌히 내주게 했다. 독립선언서는 천도교 소유의 보성사(종로 수송동 연합뉴스 뒤)에서 인쇄했다.

“천도교가 없었다면 중앙대교당이 없고, 중앙대교당이 없었다면 상해 임시정부가 없고, 상해 임시정부가 없었다면 대한민국 독립이 없었을 것이외다.”

해방 후 귀국한 김구는 바로 이곳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대주었던 천도교 교단에 감사하는 연설을 했다. 천도교는 고난의 연대에 민족과 명운을 함께 했다. 창도자 수운 최제우와 그 뒤를 이은 해월 최시형은 순교했다. 제3대 교조 의암 손병희는 3·1 운동으로 옥고를 치르다 병을 얻어 순국했다. 동학혁명 때 30만 교도가 죽었고 3·1 운동으로 수천 명이 희생되었다. 일제의 천도교 탄압과 지도부 분열 책동, 자산 몰수는 혹독했다. 그 와중에도 민족 종교의 리더답게 독립에 역점을 두고 출판활동과 어린이·여성·농민운동에 진력했다. 『개벽』『부인』『신여성』『어린이』『별건곤』『학생』『농민』 등이 수천 부, 수만 부씩 발행되었다.

1923년 5월 1일에는 손병희의 사위 소파 방정환이 중심이 되어 세계 최초로 어린이날을 선포한다. 당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던 어린이와 여성을 하늘처럼 섬기라는 해월의 뜻을 받든 실천이었다. 이처럼 교계 안팎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교세의 번창 덕분이었다.

1926년 조선 종교 현황을 보면 불교인이 20만 명, 기독교인이 35만 명이던 데 반해 천도교인은 200만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독립 이후 천도교 교세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2005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불교인 약 1100만 명, 기독교인 약 1400만 명이지만 천도교인은 5만 명이 채 되지 않는다. 불교·기독교가 40배, 50배씩 성장하는 사이 천도교는 소수 종교로 쇠퇴했다. 1970년대 초 박정희 대통령은 천도교에 우호적이었다. ‘수운회관’ 글씨도 그가 썼다. 그 덕에 교세가 되살아나다 1986년 최덕신 교령, 1997년 오익제 교령의 잇단 월북으로 교세는 급격히 위축되고 만다. 북한은 남한과 달리 천도교가 최대의 종교다.

최덕신·오익제 월북으로 교세 위축
5·16 직후 외무부 장관을 지낸 최덕신은 임시정부 법무부 장관 출신 최동오의 아들이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과 친구 사이였던 최동오는 만주 화성의숙 교장 시절 김일성을 거둬 교육시킨 인연이 있었다. 미국에서 살다가 월북한 최덕신(1989년 사망)은 김일성으로부터 최고 예우를 받았고 죽은 뒤 아버지 최동오가 잠든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이런저런 내외의 악재와 가치관의 변화로 교세가 위축돼 있지만 곧 시운(時運)이 와요. 천도교 사상이 바로 블루오션입니다. 오늘날 종교의 세속화나 물질화나 환경 문제는 인류의 패러다임을 전환케 합니다. 사람을 하늘처럼 모시고 뭇 생명을 한울님처럼 대한다면 만물이 저마다 지복(至福)을 누리게 됩니다.”

수운회관에서 만난 김동환(76) 교령은 우렁찬 어조로 인내천(人乃天) 사상의 실천을 역설한다. 그러면서 근래에 3·1 운동 정신이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단다. 사상과 종파를 떠나 온 겨레가 한 목소리를 냈던 3·1 운동 정신은 떳떳한 도리의 실천에 있다고 강조한다.

의암 손병희는 죽어서 영결식 때에야 비로소 완공된 중앙대교당 건물을 보았다. 일제는 그때 모은 교인들의 피 같은 성금 128만6000원을 압수해갔다. 금값으로 환산하니 지금 돈으로 500억원쯤 된다. 일제의 수탈은 물질에 그쳤을 뿐 한겨레의 얼은 끝내 훔쳐가지 못했다. 심령 안에 깃든 하늘을 어느 누가 빼앗아갈 수 있겠는가.

독일 역사학자 슈몰러(Schmoller)는 ‘국가는 인류를 교화시키는 가장 위대한 도덕적 제도’라고 했다. 천도교(동학)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꺼이 희생했다. 인류를 위해 용시용활(用時用活)할 때는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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