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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마 父子

프랑스 혁명기에 흑인 장군이 한 명 있었다. 그는 1762년 식민지였던 카리브해 연안 아이티에서 포병 장교이던 알렉상드르-앙투안 다비 드라페테리 후작과 아프리카계인 현지 농장 관리인 마리-세셋 뒤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 장군은 프랑스에서 흑인이라는 이유로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자유·평등·박애를 주장한 혁명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채인택의 미시 세계사

12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18살 때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로 가서 파리에서 공부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송금을 끊자 1786년 먹고살기 위해 군인이 됐다. 아버지는 가문의 명예에 해가 된다며 자신의 성을 쓰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의 성을 따라 토마 알렉상드르 뒤마로 불렸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면서 반혁명 외국군을 상대로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오스트리아군은 그를 ‘검은 악마’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 사병이던 그는 진급을 거듭해 31살 때 장군이 됐고 나폴레옹을 수행해 이탈리아·이집트 원정에 참가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그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너 따위는 얼마든지 딴 사람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폭언까지 했다. 그래서 이집트에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됐다.

공교롭게도 귀국 길에 폭풍우를 만나 이탈리아 남부 타란토로 표류했다. 그 지역을 다스리던 나폴리·양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은 그를 2년간 감옥에 가뒀다. 프랑스와 전쟁 중이었기 때문이다. 굶주림과 학대에 시달리던 그는 풀려날 때쯤 반신불수가 됐다. 한쪽 눈과 귀도 못 쓰게 됐다. 늠름하던 신체도 망가졌다. 프랑스 정부는 그를 석방시키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풀려난 뒤에도 훈장이나 위로금, 심지어 관습적인 연금 혜택조차 없었다. 백인이라면 그런 대접을 받았을까. 1806년 그는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난 뒤에도 수난이 그치지 않았다. 서거 100년을 맞은 1906년 파리에 그를 기리는 동상이 하나 들어섰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 파리를 점령한 나치군이 제거했다. 인종차별주의자인 아돌프 히틀러가 비밀리에 파리 방문을 하기 직전이었다. 놀라운 것은 전후에도 복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2009년 4월 4일 파리에 새로운 동상이 들어섰다. 황당하게도 노예가 사슬을 푸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한 번도 노예였던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나마 그의 이름이 파리 개선문의 북쪽 벽에 새겨진 게 다행이다. 지난해에는 프랑스 최고훈장인 레종 도뇌르를 뒤마 장군에게 추서하도록 요구하는 인터넷 서명운동도 벌어졌다.

뒤마 장군은 죽을 때 알렉상드르 뒤마라는 이름의 3살7개월 된 아들을 남겼다. 아이는 자라서『삼총사』『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써서 프랑스 국민작가가 됐다. 아프리카계 특유의 부푼 곱슬머리에 갈색 피부를 가졌다. 대단한 인기작가였는데도 차별을 꽤나 받았다. 이 작가를 다룬 영화를 프랑스에서 만든다고 한다. 국민작가의 힘들었던 삶을 반추하면서 인종차별의 과거를 고백하고 반성할 기회다. 미래에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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