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54>오영수와 아들 오윤

판화가 오윤의 작품 39칼노래;(1985). 광목에 채색.
오영수는 작가 생활 30년 동안 단편소설만 고집해 온 흔치 않은 소설가였다. 게다가 과작이어서 발표한 작품은 120여 편으로 연평균 4편 안팎의 단편소설만 쓴 셈이었다. 마흔 살 늦은 나이에 등단한 데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머루’ ‘갯마을’ ‘은냇골 이야기’ 등 그의 소설들은 따뜻한 인간애와 서정적 분위기를 펼쳐 보여 단편소설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바닷가 마을 청상과부의 사랑과 애환을 그린 ‘갯마을’은 1965년 김수용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대표적인 문예영화로 꼽혔다.

1909년 울주 태생의 오영수는 일본에서 공부하고 43년 귀국한 뒤 중·고교에서 교사로 지내다가 4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너무 늦은 나이를 의식했던지 그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문단에서는 다섯 살을 낮춰 1914년생으로 행세했다. 일본 유학 시절에는 도쿄 국민예술원에서 문학과 미술을 공부했다. 미술에도 재질이 적지 않았던 듯 경남여고 등에서 교사로 일할 때는 국어와 미술을 함께 가르치기도 했다. 그의 미술적 재질이 자식들에게까지 이어졌는지 딸 오숙희와 아들 오윤이 모두 서울대 미대를 나와 화가로 활동했다. 특히 오윤은 재학 중이던 60년대 후반부터 ‘민중 판화’라는 독특한 장르를 개척해 86년 마흔의 나이로 타계할 때까지 줄곧 화단의 주목을 끌었다.

오윤은 누나 오숙희와 미대 입학 동기인 저항시인 김지하(59년 입학 당시 미학과는 미대에 속해 있었다)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대학 4학년 재학 중이던 69년 세 명의 학우와 함께 ‘민중미술’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현실동인’ 그룹을 결성해 전시회를 준비했으나 학교 측의 고발에 따른 중앙정보부의 강압으로 열리지 못했다. 이 동인에도 김지하는 미술평론가 김윤수와 함께 이론가로 참여했다. ‘현실동인’ 창립전은 열리지도 못했으나 그 후유증 또한 만만치 않았다. 동인 네 명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밤샘 조사를 받고 풀려났으며 그 부모들은 중앙정보부로부터 호된 질책과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사건이 일단락된 후 오영수는 아들을 불러 크게 꾸짖었다.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에서 비롯된 꾸짖음이었으나 본질적으로 이들 부자의 예술관이 상반돼 있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오영수의 작품들이 이따금 현실적인 삶과 동떨어진 세계를 그린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문학예술의 순수성을 고집하는 데 비해 오윤은 민중의 삶과 유리된 예술은 존재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오영수는 김지하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오영수는 아들의 그런 예술관이 김지하로부터 영향을 받은 탓이라 생각하고 ‘좌파’ ‘배후 조종’이란 표현을 써 가며 김지하와 관계를 끊으라고 아들을 윽박질렀다. 그때 오윤은 완성해 놓은 대형 판화 작품들을 날카로운 작업칼로 북북 찢으며 아버지에게 이렇게 강하게 맞섰다고 김지하는 후에 회고했다.

“아버지가 예술가라면 저도 예술갑니다. 예술가라면 누구나 자기 예술과 자기 생활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 사람을 존경합니다. 만약 아버지가 제 예술을 간섭하신다면 저는 예술을 포기하렵니다. 예술이 없는 제 인생은 죽음입니다.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지요. 그러면 만족하시겠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생각은 계속 평행선이었다. 더구나 이듬해인 70년 김지하의 담시 ‘오적’이 ‘사상계’ 5월호에 실리고, 종적을 감춘 김지하가 지명수배되면서 그 불똥은 오영수에게로 튀었다. ‘오적’에는 오윤의 그림이 삽화로 곁들여졌는데 김지하가 후배를 염려해 그림에 자신의 사인을 넣었으나 그 그림이 오윤의 것으로 밝혀지고 오윤도 쫓기는 신세가 된 것이다. 오영수와 딸 오숙희는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호된 곤욕을 치러야 했다. 오영수에게는 김지하가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일이 있은 뒤 오윤이 적극적인 미술 활동을 펴지 않았던 것도 아버지와의 갈등이 다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경주ㆍ벽제 등지에서 벽돌공장을 운영하는가 하면 주로 건물의 테라코타 벽화나 부조(浮彫) 따위를 제작했다. 79년 봄 아버지가 타계하자 오윤의 작품 활동과 민중미술 운동도 본격적으로 재개됐다. 80년 민중미술 계열 동인인 ‘현실과 발언’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86년 6월에는 처음이자 마지막 전시회도 열었다. 하지만 지병인 간질환이 악화돼 전시회가 끝난 지 한 달도 안 돼 마흔 살로 세상을 떠났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문학 평론가로 추리소설도 여럿 냈다. 196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동네에서 생긴 일』을 펴냈다.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